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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무영 젊은사람들

by 역달5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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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

1

대엿새 잡고서 간 사람이 달포나 되어서야 돌아왔다는 것이니, 응당 그렇게나 늦게 된 까닭부터 물었어야 할 것인데 진숙은 불쑥, "오빠 혼자?" 하고 묻고 나서야 아뿔싸 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단다.

"그럼 혼자지, 제 오라비가 동부인하고 서울 갔더냐?"

오라비의 신상에보다도 종호 소식에 더 마음이 팔린 딸을 편잔주고 싶은 마음에서 였으리라.

그러나 진숙이는 어머니가 그러한 딸의 심정을 얄밉게까지는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어머니의 핀잔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 하는 딸이 대견히 여기는 사위를 두둔한다고 핀잔을 주는 친정어머니의 모 지지 않은 핀잔처럼 부드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미안!"

진숙이는 군인처럼 경례를 하고서, 냉큼 화제를 돌리었다.

"난 오늘두 안 오신 줄 알았어. 삼일상회서두 모른다잖아? 그래두 또 미심 다 워서 버스 회사에두 들러봤었지. 그랬더니 거기서두 못 봤다구 그러는군. 그래 꼭 안 오실 줄만 알구 어찌두 맥이 풀리는지. 오늘은 꼭 오시려니 했다가 안 오셨다니까 몇 개 안 되는 과일 봉지가 갑자기 천 근이나 되는것 같겠지!"

"옳지, 그러니까 들이닥치는 대루 오빤 혼자 왔수냐?"

"아이, 어머니두! 사과했는데 뭘 그러슈." 하고 진숙은 면구스러우니까 제라서 까르르 웃어 붙이고서, "오 빤?"

"연못가에 간 게지."

"연못가엔 혼자 뭣하러?"

"그럼 연못가엔 꼭 둘이 가야 맛이라던? 혼자 조용하니 앉았어야 연 꽃잎 피는 소리두 들리구." 하면서 억지로 웃음을 참는데 옆에서 달 순이가, "아니 라우, 언니. 서울 아저씨하구 같이 나갔다우!" 하고 뚱겨준다.

그 말에 진숙은 덧없이 한숨을 후유 돌렸다. 말도 못하고 그런 내색도 할 수는 없었으나, 정말 오빠 재덕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몇 곱절 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이가 오빠의 생명보다도 내게 더 귀중했던가?…’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이런 질문에 진숙은 터진 물 막듯,

'오빤 늦더래두 올 사람, 종호 씬 영원히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사람 ─’

이렇게 휘갑을 치고서 자기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 보니 할 일은 없었다. 그대로 연못으로 뛰어가고 싶은것을 언니와 어머니한테 낯이 간지러워서 방으로 들어왔다 뿐이다.

사랑 앞에서는 처녀는 언제나 수줍기만 한 법이다.

진숙이는 아침에 꺼내놓은 진솔 깨끼저고리에 역시 흰 조세트 긴 치마를 갈아입으면서도, 몇 번이나 종호가 돌아와 준 것을 고맙게 여기었다. 자기 본위만이 아니었다. 오빠 재덕이도 친구요 동지였던 종호를 잃은 뒤로는,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만큼 풀이 죽었었다.

'고마우셔라! 종호 씨!’

진숙은 지금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종호가 옆에만 있다면 안아 주기라도 하고 싶은 아니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게 흥겨웠다.

땀 찬 발에다 손(좁은) 버선을 신느라고 애가 쓰이는데,

"얘, 너 뭣하냐? 어서 나가서 오라비 저녁 먹으라구 일러라." 하고 어머니가 되레 재촉이다.

"네, 지금 나가요." 하고 진숙은 사뿐 몸을 일으키었다.

─ 그렇다고 진숙이가 경대 앞에 앉지 않은 것은 아니다. 머리에도 손질을 했고 상기된 얼굴에는 분기도 가벼이 뿌리었다. 무섭게 잽싼, 그리고 무섭게 세련된 동작이었다.

밖은 마침 촉촉히 젖은 젖빚 황혼이 내리고 있다. 열나흘 달이 벌써 떴는지 동쪽 하늘에는 자줏빛이 돈다. 진숙은 늙은 수양버들 가지가 터널처럼 추 욱추욱 늘어진 정원을 지나서 연못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연못가에 갔다면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연못 아랫둑 한복판에 할아버지가 십년 공을 들였다는 반송이 있고, 그 밑에 생자작나무를 찍어다만 들어놓은 걸상 한 틀이 있었다. 오빠와 종호라면 반드시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인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 그림자도 없다.

"동산에들 올라갔나?"

동산에 오르면 한강 상류가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봉이 있다. 그들 뿐 만이 아니라, 근방 사람들이 다 비로봉이라고 부르는 봉이다.

그러나 비로봉까지는 한참 초간한 길이다. 연못둑을 한바퀴 돌아서 약물터 골짜기로 돌아오려니까, 또닥또닥 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조심 가까이 가보니 약물을 등지고 둘이 나란히 앉아서 어둡는 줄도 모르고 무슨 깊은 생각에들 잠겨 있다.

돌을 뚜드리는 것은 오빠 재덕이었다. 오빠의 손에서는 가끔 신경이 짜릿거리는 파아란 불똥이 튀고 있었다.

아끼는 오빠와 사랑하는 사람을 시야에다 넣은 처녀의 마음은 푸근한 안도와 흐뭇한 만족에 장난치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서 '오빠!’ 하고 목 고개를 거의 다 넘어온 소리를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조심조심 그들의 등뒤에까지 가서야 비로소, "오빠!" 하고 뱉으면서 재덕이의 어깨를 탁 쳤던 것이다.

"아따, 깜짝야!"

사랑하는 누이한테는 속는 것도 즐거운 법이다. 오라비뿐이 아니다. 누이도 역시 즐거웠다.

그러나 진숙은 피가 싹 걷히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빠한테보다두 이 손님께 사괄 해." 하고 가리킨 사람은 뜻밖에도 종호가 아니다. 어둡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아 그랬던지 뒷모습도 종호 같던 그 청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젊은이였다.

"미안합니다. 놀라시게 해서 ─"

진숙은 얼결에 이렇게 사과를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미안은커녕 감사합니다."

진숙은 눈물이 핑 솟았다. 무안했을 때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진숙은 처음 알았다.

"이 사람, 숙녀가 사과를 하건 다소곳이 받아줄 것이지 왜 이리 빗나가나?"

"아니야, 정말. 자네두 아까 보잖았던가. 나 약 먹던 걸?"

"옳아, 놀라서 체증이 떨어졌단 말이로군. 그두 그래. 건 치할 할 만두 하구 받을 만두 하네나그려. 하하하하!"

재덕이는 일부러처럼 버레기 깨는 소리로 웃어 붙이고서,

"얘 진숙아, 받을 만하다. 받아둬라." 하고 또 한바탕 웃어댄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진숙이는 눈물을 닦고서 정식으로 사과를 다시 했다.

"원 천만에요. 정말 내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아침에 한술 떠먹은 것 이 진종일 징커니 내리지 않아서, 재덕 군두 봤지만 아까두 활명술 사먹구 온 길이 랍니 다. 덕택에 후련하니 내려갔나 봅니다."

시치미 뚝 떼고 하는 이야기에 진숙이도 그만 웃고야 말았다.

2

그날 밤, 진숙은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서 애를 썼다.

도시 모두 어떻게 된 일인가? 일주일이면 휭하니 갔다오겠다던 오빠는 무슨 일로 한 달이나 서울에서 지체가 되었으며, 무슨 일이 있든지 꼭 끌고오겠다던 종호는 어떻게 오지 않았으며, 또 오늘 온 청년은 누군데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오빠와는 어떠한 관계인가? 짐 하나 없는 것을 보면 하루 이틀 묵어갈 사람이겠지만, 서울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 제는 오빠와도 이만 저만 한 사이가 아니기도 한 모양이다.

'그이도 학병 출신인가?’

이렇게 생각하노라니, 문득 종호가 온 것도 작년 이맘때였더니라 싶다. 그날은 마침 읍에서 대분란이 있었던 날이었다. 징병, 징용, 보국대 등으로 끌려 나갔던 청년들이 '귀환 징용자 원호동맹’이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왜정 때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의 집을 이잡듯 하면서 마구 부수는 판이었다.

이날 하루에 읍내에서만도 세 채에 불을 질렀고, 사람이 둘이 죽었었다. 상한 사람은 무려 수십 명이나 된다고 했다.

진숙의 아버지 신구영 씨도 이날 봉변을 당한 사람 중의 하나다. 두드러지게 한 일은 없었지만, 외국 유학을 하고 왔다는 약점이 있어서 두어 번 끌려나가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그때에는 누구나 해야 할 말을 한 십오분씩 떠든 것이 해방이 되자 치인 것 이었다.

군중들은 큰사랑 앞 열두 칸 마루에 빽빽하니 자리를 잡고서 진숙의 아버지 신구영을 돈대 밑에 꿇어앉히었다.

"너 이눔, 네 죄를 아느냐?" 하고 두목이 거드름을 피우며 심문이 시작되었다.

"나 한 일은 나 자신보다도 그대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신구영의 대답은 이러했다.

"뭐 이 자식, 그대들? 그대들이란 어디다 쓰는 문자냐? 누굴 보구서 그대들이라는 거야?"

말이 옥신각신하더니 한 자가 몽둥이로 신구영의 어깻죽지를 후려쳤다.

신구영은 그 자리에 푹 엎어지고 말았다.

"그놈을 죽여라!"

"자백을 시켜라!"

"달구쳐라!"

군중 속에서 이런 소리가 빗발치듯 했다.

바로 그때였다.

군복 셔츠 바람에 키가 후리후리한 한 청년이 썩 나타났다. 머리는 더부룩하나 막 깎은 머리였다. 얼굴빛은 누렇고 퉁퉁 부었다.

얼핏만 보아도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 분명했다.

"여러분! 조금 진정하시오!" 하고 그 청년은 손을 번쩍 들어 군중의 주의를 이끌어 모아놓고서, "나는 이 댁 아드님 신재덕 군의 동창생입니다. 학병 시대의 동지였기 때문에 지금 감옥에서 나오는 길로 동지를 찾아왔다가,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나는 아직 재덕 군도 만나지 못했고, 또 재덕 군의 춘부장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도 모릅니다. 죄를 졌다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주는 사람이 한 개인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죄는 법만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죄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서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웅변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근차근 따지는 그의 말은 군중의 흥분을 가라앉히었다. 이쪽 저쪽에서 울근불근하는 소리도 없지 않았으나, 그가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사실이 군중으로 하여금 생각할 여유를 주었던 모양 이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나도 친일파, 민족 반역자에게 희생이 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이분에게 정말 죄가 있다면 나 자신도 용서치 않을 것 입니다. 뜯어먹을 죄면 뜯어먹고 갈아먹을 죄면 나도 갈아먹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부르짖었을 때는 한귀퉁이에서 박수까지 일어났었다.

그때다. 두목 격인 한 청년이 내려와서 그의 손을 잡고서,

"얼마나 고생하셨소." 하고 인사를 하는 바람에, 군중은 흐지부지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교 롭게 도 이 단장은 사흘 전 청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자기 사촌 매부를 맞으러 갔다가 인사를 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이 소동이 지난 뒤에서야 송종호와 재덕이는 만났던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종호는 감옥에서 병든 몸을 진숙의 집에서 조 섭했던것이다.

병명은 황달이었다. 황달이 그만해지자, 이번에는 관절염이 도졌다. 뼈를 깎듯이 아픈 모양이었다.

전후 반년간 진숙은 충실한 간호원이었다. 여름방학에 집에 왔다가 해방을 맞은지라, 몇 달만 다니면 졸업이었지만 학교가 시원치 않았다기보다도 종 호의 간호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진숙이는 송종호에게 충실했다.

그러나 진숙이가 정말 송종호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발견한 것은 송종호를 떠나보낸 후이다. 소위 '신탁통치안’이 계기가 되어 틈이 벌기 시작한 송과 재덕이와는 그들 말대로, "우정은 우정, 사상은 사상."

이렇게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놈저놈 하고 싸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헤어질 때의 그들은 역시 서로의 몸을 아껴주는 정다운 친구였었다.

"자네와 내가 총을 맞대고 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재덕이가 헤어지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 송종호는,

"그런 날이 오기를 빈다." 하고 손을 흔들어대었다.

"우리가 서로 총질을 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자기 신념대로 살았다는 증거니까."

"그럼 잘 가게!"

"잘 싸워주게!"

이렇게 그들이 인사를 주고받는 옆에 서서 진숙이는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었다. 정이 들었던지라 어머니도 눈물을 머금었고, 진숙이와 함께 정성껏 시중을 들어준 금녀도 어머니의 어깨에다 얼굴을 대고 울어대었었다.

"그 사람 가는데 금녀년이 젤 서러운가보더라. 그냥 엉엉 울잖겠니."

이런 이야기만 꺼내면 금녀는 지금도 얼굴이 새빨개진다.

이렇게 한번 간 종호로부터는 그후 반년이 되도록 이렇다는 소식 한 장 없었다.

그렇던 종호가 다시 병이 도져서 자리에 누워 있다는 소식이, 그나마도 풍 편으로 전해온 것이 두어 달 전이었다.

"오빠, 서울 한번 안 가시우?"

"서울은 왜?"

진숙이의 마음을 몰라서가 아니다. 종호를 다시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 를 결정 짓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쎄 … "

믿고 사랑하는 오빠면서도 털어놓고 말할 수 없는 진숙의 안타까움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진숙아!"

"응."

"너 지금두 송 군을 생각하구 있냐?"

한번 불시에 이런 질문을 오빠 재덕이한테서 받은 일이 있었다. 재 덕이가 서울을 떠나던 바로 며칠 전, 별빛이 달밤처럼 밝은 밤이었다.

은근히도 기다리던 말이었다. 안타까이도 바라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진숙이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그대로 울음만이 터져서 어린 애처럼 울고 말았던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면서도 훌훌이 떠나간 종호, 가서는 이렇다는 편지 한 장 없는 종호 ─ 그 종호에게 대한 원망보다도, 누 이의 마음을 그토록이나 몰라주는 오라비에 대한 원망의 설움이었다.

"진숙아, 잊어라."

이 말에 진숙은 몸을 발딱 일으켰다. 진숙이가 일찍이 오빠 앞에서 취 해본 적이 없는 반항의 태도였다.

"네 맘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단념해야지 옳다. 종호는 나의 친구다. 그러나 오늘날의 송 군과 나는 동지는 아니다. 나는 그에게 있어서 적이다.

그는 내게도 적이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누이를 적에게 주고 싶지는 않다. 네가 간다면 구태여 막지는 않겠지만, 가도록 권할 수는 없다. 네가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을 버리고까지 가야만 한다면 모르되, 나는 네가 거기까지 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 너는 지금 송 군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단지 옳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만으로서 송군을 쫓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송 군의 육체와 송 군의 사상과 같이 죽고 같이 살 수 있다면, 나도 굳이 막지는 않을 것이다."

재덕이는 이런 긴 말을 하고 나서,

"어떠냐? 그만한 신념이 있나? 없지? 없으면 단념해야지."

그날부터 진숙은 일체 종호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재덕이한테뿐이 아니라, 진숙이 자신의 머릿속에서도 종호에 대한 기억은 깨끗이 씻어 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재덕은 갑자기 서울로 떠났다. 혹시 종호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변했다면 다시 손을 잡아보자 함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가 혼자 온 것을 보면 종호가 아름다운 우정을 박절히도 거절한 것이 분명했다.

'족히 그럴 사람이지!’

눈앞에서 영원히 끊어져 가는 인연의 실끝을 바라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나약한 처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큰 시련이었다.

진숙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대로 앉았다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무데고 훨훨 좀 싸다니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아서 만여 평이나 되는 정원을 헤메어보나, 종호의 기억이 맺혀지지 않은 한 개의 돌도 한 포기의 꽃도 이 정원에는 없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진숙이가 얼싸안고 나니, 종호에게서 미국 독립전쟁 이야기를 듣던 소나무다.

진숙은 질겁을 해서 그 자리를 떴다.

비틀거리면서 자리를 옮기고 나니 걸상처럼 된 느티나무 뿌리였다. 종 호가 서울로 떠나던 바로 전날 밤, 긴 작별을 한 것이 바로 이 나무뿌리가 아니었던가? 한 처녀가 순정을 바쳐 눈물로써 만류하는 것을 칼로 베이듯이 뿌리치던 나무뿌리, 종호는 낙타 등처럼 생긴 뿌리에 앉았었다. 그 옆 갈라진 뿌리가 진숙이의 앉았던 자리였다.

"진숙 씨!"

"네."

"날 더 잡지 말아주시오. 나는 가야 할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가야만 할 사람입니다. 진숙 씰 위해서나 재덕 군을 위해서 ─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나 ─""이유가 뭘까요?"

"이유? 얼마만 있으면 알 것입니다. 나란 사람은 여기에서는 용납도 못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니 벌써 오고 있습니다. 나는 벌써 생리적으로 이 고장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고기가 물 없이 어떻게 삽니까? 여기는 육지입니다. 나는 물을 찾아가야 살 수 있지요. 바다를 ─ 자, 약속 해주시오, 더는 붙잡지 않는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네, 진숙… "

그때까지 진숙의 손은 종호의 포갠 손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종호는 이 말을 최후로 한 손으로 진숙의 손을 아스러지게 쥐었다놓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방으로 되어 있는 작은사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진숙은 그때의 종호의 마지막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서 다시 자리를 옮겼 다. 아니, 비틀거리다가 몸을 지탱할 수 없어서 쓰러졌다는 자리가 바로, 불로초 밭, ─ 진숙이가 스물두 해 동안 살뜰히도 지켜온 처녀의 입술을 종호한테 허락한 자리였다. 진숙이가 일생에 한 번 허락한 키스는 실로 긴 키스 였다. 그때 아찔하는 현기를 느꼈던 것을 진숙이는 이 불로초 밭을 지날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추억했던 것이다.

'일어나야지. 이 무서운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진숙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일어났다가는 그대로 푹 엎어질 것만 같았다.

'어머니!’

진숙은 횟배 앓는 아이처럼 불로초 잎을 바닥바닥 뜯어대며 몸부림을 치고있었다.

'왜 그를 따라가지 못했던고?’

지금의 진숙에게는 오직 이 원한뿐이었다.

3

"진숙아!"

"네?"

"너 나하구 얘기 좀 하잖으려냐?"

"무슨?"

"무슨 얘기든지."

"하셔요." 하고 진숙은 선선하다.

그날부터 이틀 후다. 진숙이는 오빠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동요되지 않을 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지 종호의 뒤를 쫓아가리라 결심한 것이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몸까지 가볍다. 그래서 오늘 아침 처음으로 연못가 에나와 앉아 있는데 읍에 나가던 재덕이가 가까이 왔던 것이다.

"무슨 얘길 한대두 놀라지 않지?"

"놀랄 만한 얘기면 놀라야죠. 놀라지 않으면 오빠가 놀랄 만한 얘기라 구 하신 보람이 있어요?" 하고 나긋나긋하게 웃어보인다.

"아차, 내가 말을 실수했군. 그럼 정정하지." 하고 작업복 주머니를 모두 들까불듯시피 해서 담배를 피워문다.

청년운동을 하면서부터 입기 시작한 작업복이다. 두툼한 서류 든 봉투를 낀 품이 오늘도 무슨 회가 있는 모양이다.

"무슨 얘길 하든간, 비관을 하지 말란 말이다."

그는 이렇게 고치고서 누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듯 한다.

비관이란 말에는 뜨끔한지, 진숙의 서늘한 동자는 신경질로 움직인다.

"비관?"

"그래, 무슨 얘기를 듣든지 비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할 수 있겠지?"

"종호 씨 얘기죠? 하세요, 무슨 얘기든."

종호를 데리러 갔다가 안 오니까, 꿩 대신 닭은 못 쓰느냐고 진숙이는 아직 성명조차 모르는 청년을 데리고 왔다는 것쯤은 진숙이도 벌써 짐작 하고있는 터였다.

어젯밤 어머니와 무슨 얘기가 길더라고 금녀란 년이 귀띔해주었듯이 종호 대신 이 청년을 가까이하게 해서 내 맘을 돌려보자는 수작이거니 했다.

"좋아요, 뭐든지 얘기하셔요."

메어다치자 함이 아니라, 사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자기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럼 좋아. 다른 게 아니구 내가 이번 서울 간 데 대해서 네가 젤 궁금해 할 이야긴데 ─"

이렇게 서설을 벌여놓더니 밑도 끝도 없이,

"송 군은 불행히도 이번에 세상을 떠났다." 하는 것이다.

"그래요? 할 수 없죠."

뜻밖에도 진숙이는 슬퍼하기는 고사하고 놀라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말은 않았지만, 진숙이는 오빠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단안을 내리고 있었다.

"송 선생이 돌아간 이야기가 도대체 저와 무슨 관련이 있대요? 사람이 났다가 죽기두 하고 죽으면 묻구 그뿐 아녀요?"

"얘, 넌 내 말 잘못 해석하는 거 아니냐?"

재덕이는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었으나 진숙이는 오히려 가벼이 받아 넘긴다.

"그럴 리 없을걸요."

"아니야, 넌 정녕코 내게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있거나 ─ 혹 넌 내가 거짓말을 해서 너를 단념 시키는 수단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거니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친구를 죽었다고까지 거짓말을 할 오빠는 아니다. 이번 송 군 장사엔 만태, 승수, 진복이 등 동창생들이 다 모였었으니, 나중에라도 알아보면 알 일이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이 오라비 손으로 ─"하는데 진숙이가 "흑!"하고 소리를 낸다. 이제야 곧이들리는 모양이다.

"사상은 사상이요, 우정은 우정이 아니냐. 나로 본다면 ─"

"인저 그만하셔요, 오빠!"

진숙은 질겁을 하듯 오라비의 입을 막고서 그 서늘한 눈을 커다라니 뜬다. 긴 속눈썹 끝에 맺힌 이슬 방울이 마침 초가을 아침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빛난다.

진숙은 그래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있다.

이윽고 눈물 한 방울이 상큼한 콧나루를 타고 골진 데를 더듬어 흘러내린다.

"진숙아, 부디 마음을 가다듬어라. 네 슬픔을 오라비만은 잘 안다. 이런 말을 한다면 송 군의 영혼이 노하겠지만, 한편 난 어차피 합칠 수 없는 평행선 일 바엔, 차라리 그렇게 된 것이 다행스럽게까지 생각이 든다. 송 군 이 우리 사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상으로 너도 공산주의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

"오빠, 인저 그만해 두세요. 네, 오빠!"

"그만하지. 그 대신 어서 들어가 아침이나 먹어라. 조반 전이라면서?"

"곧 들어가겠어요."

"그래라. 어머니두 걱정을 하구 계시다. 할아버지두 들어가 뵙구. 간밤에 많이 편치 않으셨던 모양야. 응, 어서 ─"

"네, 들어가요."

"그래라. 내 다녀오마."

재덕은 모표도 없는 국방모를 푹 눌러쓰고 서류 봉투를 둘러메듯 어깨에다 얹더니, 몇 발 가다 말고 되돌아서 온다.

"참, 그제 밤에 온 친구 소개한다는 걸 잊었구나. 나와는 중학 때 한 하숙에서 삼 년이나 지냈구, 이번 박 군두 학병으로 나가서 탈주를 했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넉 달 전에 불행히 잡혀서 작년 해방에 나왔다가, 고향에서 온 집안이 반동분자로 숙청을 당했지. 무섭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지 금제천까지 가던 길에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탔기에 며칠 쉬어 가라구 붙들었더니라."

진숙이야 듣든 말든 이렇게 소개를 늘어놓고는, "참, 너 혹 우리 읍내에 박경애란 여자가 있다는 소리 못 들었냐?"

"누구?"

"박경애란?"

"왜 그러세요?" 하고 진숙은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그런 여자가 있단 소리 못 들었냐 말여."

박경애라면, 바로 장혜영이네 집에 있는 병색 꼴이 나는 여자다.

"같은 이름인진 몰라두, 하나 있긴 있어요. 저 혜영이네 집에 ─"

"아, 그래? 그럼 그 여자가 뭘 잘하는 게 없다던?"

"글을 좀 쓴대. 우리집에두 한 번 놀러왔댔었는데." 하는 말에 재덕이는 무릎을 탁 치면서, "오라 잇!" 하고 소리를 친다.

오라잇 소리 한마디를 하는 동안에 재덕이는 벌써 사랑 쪽으로 대여섯 발이나 뛰어가고 있었다.

"박 군, 박 군! 어서 나오게. 매씨를 찾았네!"

재덕이 소리를 듣더니 박건도 뛰어나왔다. 청년운동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머리까지 깨끗이 빗었다.

재덕이는 박건을 진숙이 앞으로 끌고 오더니,

"매씨가 글을 쓴댔지? 그래, 그럼 제천까지 갈 필요가 없네. 제천이 아니라, 바루 여기 있어."

"제천 계셨다면 틀림없을 겝니다. 올 여름까지두 제천 국민학교에 계셨다니까 요. 저 희랍 미인처럼 생기셨지요?"

"위인이 희랍 미인을 봤어야 말이지."

"희랍 미인까지는 몰라두 살결은 몹시 흽니다. 코가 동양 사람 코치 고서는 좀 날카로운 편이랄까?"

"그럼 틀림없는 매씨신가 봅니다!"

"글쎄요, 그렇기나 하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기실 그것이 일곱 식구 중에서 똠방 하나 남은 우리 혈육입니다!"

"그러세요."

진숙은 이제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흥미를 갖는지,

"아니, 어떻게 해서?" 하고 오빠와 박건을 번갈아 쳐다본다.

"아니, 쟤 좀 보게나. 너 아까 남이 이야기할 땐 어디 갔다 왔니? 이북에 서 반동분자라고 온 가족이 숙청을 당했다니까 ─""아니, 그럼 숙청이라는 게 정말 죽이는 것인가요?"

"쟤 좀 보라니까."

"그렇습니다. 숙청이란 바로 총살입니다."

진숙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그래요?" 할 뿐이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북에서는 악독한 친일파, 민족반역자까지도 생명만은 절대로 보장해주었다고 종호한테서 듣고 있었던 것이다.

'숙청’이란 말도 '사형’이란 말이 아니라 '근신’시키느라고 관직에서 일시 몰아내는 뜻이라고만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에서 말하는 것은 이북을 중상하기 위해서다 ─"

종호는 이렇게 말했었다.

'종호 씨가 그런 거짓말을 버젓이 하는 사람이었던가?’

모를 소리였다.

"그럼, 너 얼른 아침 먹구 박 군하구 좀 가보게 해라. 누이가 제천 읍내 있다는 말만 풍편에 듣구서 찾아가던 길이란다. 거 보게, 이 사람, 그날 내 말 안 들었으면 고생만 죽두룩 했지 뭔가. 그러기에 어른 말씀을 어려워하 랬지."

"어려워했으니까, 자넬 따라오지 않았는가."

"인제야? 어쨌든, 너 곧 모셔다 드려. 오후 두시쯤 내게루들 오지. 내 중국요리 한턱 씀세. 그럼 난 먼저 가봐야겠네." 하면서 시계를 보더니 늦었다고 들고뛴다.

진숙으로서는 부지런히 서둔다는 것이 박건과 같이 집을 나온 것은 열한시가 다 되어서였다.

늘 나다니는 읍내였고 보니, 별 치장이 필요치는 않았지만 어쩐지 오래간만에 깨끗이 차리고 싶었다. 그래서 장을 온통 들거울러서 깊숙히 들었던 벨벳 치마를 꺼내어 입었다. 저고리는 연회색을 꺼냈다가, 흰 옥양목 겹 저고리로 갈아입었다.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가 역시 언제나 말쑥하다 싶었다. 진숙은 거울 앞에 서보고 더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에 흡족했었다.

추석 직전의 한낮, 햇볕은 아직 따갑다.

둘은 신작로에 나오도록 한마디도 교환하지 않고 걸었다.

"그럼, 박 선생님은 이번에 나오셨습니까?"

"네, 서울 온 지 한달 가량 됩니다."

"고향이 황해도라셨던가?"

"재령입니다."

"아 참, 재령이시라더라. 장수산이 바로 거기라구 경애 씨가 한번 말씀 하시더군요. 경애 씬 사뭇 이남에 계셨던가보던데요?"

"걘 일본 있다가 해방되구서 나왔었지요. 나두 만난 지가 삼 년 가까이 됩니다."

"아이, 어쩌면!"

필요치 않은 데 놀라보이는 것도 여자들이 호의를 보일 때 쓰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북은 어떻습니까? 농촌에두 전부 전기가 통했다죠?"

"더러 통한 데가 있지요." 하고 말 적게 대답 하더니만,

"통했대야 어디 전기들을 씁니까."

"왜요?"

"비싸니까요."

"그렇게 비싸요?"

"비싸지요! 석유도 비싸지만, 전등은 그 비싼 석유값보다두 삼 배 반은 될 겁니다."

"그럼, 전기를 두구두 석유들을 쓰겠군요?"

"석유를 뭣하러 씁니까?"

"어떡하시는 말씀일까?"

진숙이가 핼끔이 쳐다보니까 박건은 껄껄 웃는다.

"그러실 겝니다. 전기두 안 쓰구 석유두 안 쓰구, 그럼 뭘 쓰느냔 말씀 이 시지? 안 씁니다, 안 써. 아무것도 안 쓰면 되잖습니까. 저녁만 먹으면 쓰러져 자지요. 또 보름 동안은 곡식 안 달라는 천연등이 있구요. 이남에선 눈으로 보지를 않아서 뭐가 좋으니 어쩌니들 합니다. 한말루 해서 지옥 이지요. 그나마두 생지옥입니다. 뺑 둘러서 모닥불을 질러놓고서 달구치는 ─"

여기까지 말하더니만 박건은 아주 길가에 떡 서버린다.

"여기서 소위 반동분자란 것이 생깁니다. 모닥불을 보고 불이라 해도 반동이요, 뜨겁다 해도 반동이요, 가만히 앉아서 죽기가 싫어서 울안에서 단한 발자국이라도 내어 디디는 날이면 따따따딱 ─ 이렇습니다. 가장 되는 사람이 월남을 했으면 그 집 문간에는 '반동분자의 집’이라는 널판쪽이 덜컥 붙습니다. 그것이 붙는 날이면 그 집 사람은 다 살았지요. 이것이 자유 입니다. 이것이 농민의 나라요, 노동자의 천국입니다. 교장실에 꽃병을 놓고 꽃을 꽂았다는 죄로 부르조아 반동으로 몰려서 쫓겨난 것까지는 좋지만, 이 년간 중노동을 하는 교장이 있는가 하면, 좁쌀알을 잘못 헤었 다가 수양 ─ 감옥이란 말이죠. 수양 간 사람이 아마 수백 명은 될 겝니다. 이 것이 지상낙원이란 것이지요. 지상낙원! 그래두 남쪽에선 ─"

이때 국방복을 입은 두세 사람이 지나다가 힐끗힐끗 보는 바람에 박건은 말을 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의 말을 중단시킨 그 국방복 패들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밤에라 두 계속하지요." 하고는 덤덤히 걷는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남쪽에서들은 '인류의 적’이란 말들을 많이 쓰는데, 놈들의 하는 짓을단 하루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 '인류의 적’이란 말이 아주 실감이 날 겝니다.

그는 귓속말처럼 이렇게 속삭이고 다시 저만큼 떨어져 걷는다.

그러다가는 어느새 또다시 진숙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뭐라고든지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진숙에게는 또한 무서운 놀람이었고, 그대로 몸서리가 쳐지는 공포였다.

4

불과 며칠 되지 않는 동안이었건만, 박건에 대한 진숙의 감정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물론 경애라는 매개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그가 부모와 형제, 전 가족 일곱 중에 똠방 남매만이 남고 전부 '숙청’을 당한 데대한 여성으로서의 동정도 큰 작용을 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부글부글 끓는 기름 속을 연상시키는 그의 정열 ─ 나라와 민족을 알뜰히도 아끼고 사랑하는 지성에 진숙은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그의 성격은 그대로 시퍼런 칼날 그대로다.

몸도 좋았다. 동양 사람의 키로는 크면 컸지 작은 키는 아니다. 떡 벌어진 가슴은 그대로 철판을 연상시킨다. 왕방울처럼 부리부리한 시꺼먼 동자에 한 줌은 되게 숯이 많은 꺼칠한 겉눈썹, 얼마간 곱슬한 기운이 있는 머리, 모가 지면서 약간 치켜붙은 어깨, 이렇게 뜯어보면 어디 한 군데 수월해 보이는 구석이 없건만, 진숙의 말마따나 희랍 여성의 코처럼 단정해 보이는 코와 탁 트인 이마가 더없이 너그러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일주일을 묵고서 다시 서울로 가겠다는 것을 붙든 것도 실상 진숙이었다.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빠를 아무 생계도 없는 서울로 보내는 것을 뼈 아프게 여기는 경애를 위해서였지만, 진숙이도 어쩐지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종호의 대리를 삼자는 의도는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박건이조차 휙 가버린다면 몹시 허전할 것만 같았다.

"진숙씨, 정말 우리 오빠 좀 붙잡아주실래어?"

"붙잡아드릴게."

"정말? 아이, 고마우셔라! 기왕 붙들어주시거든 먹여까지 주셔야지 뭐, 한 달 동안만. 네, 그동안에 난두 몸을 좀 추스르면 또 취직을 할 테야요. 그때까지만 꼭 좀 부탁해요. 그러신댔지? 아이, 고마워라!"

경애는 갓난쟁이처럼 손바닥을 치면서 기뻐했던 것이다.

어머니한테 의논을 하니까 어머니는 또,

"그럴 것 있냐 뭐. 기왕 먹여줄 바엔 남맬 다 오라구 그러지. 오라빈 네 오라비 동무 되구 경앤 또 네 동무 되구."

"정말, 어머니?"

"망할 것, 이건 늘 누구한테 속아만 봤는지 걸핏하면 정말? 정말? 쯔쯔쯔 ─"

"아이구, 고마우셔라! 어머니, 감사 감사하오이다."

경애가 자기한테 치하를 하듯이 이번에는 진숙이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던 것이다. 아니 진숙은 넓죽넓죽 절까지 했었다.

또 한 가지 진숙이로 하여금 박건을 가까이하게 만든 원인이 하나 있다. 박건도 자연 종호가 쓰던 작은사랑을 쓰는 터라, 진숙은 무의식중에 방문 앞에 서보는 것이다. 그럴라치면 어떤 때는 송종호와 박건과의 구별이 없어지고 그대로 자기와의 거리가 단축되는 것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때는 순정의 처녀 가슴에 못을 박고 간 종호가 뼈아프게 회상 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비록 종호가 아닐지라도 그 방에 누가 있어주는 것이 좋았다. 빈방처럼 보기 싫은 것은 없지만, 그 방이 정든 방일수록에 더한 법이다.

"선생님, 뭘하셔요?"

물론 볼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정원에 들고날 때마다 그 방문 앞으로 지나치니까, 그저 말을 건네어보는 것뿐이다.

그전 종호가 이 방을 쓰고 있었을 때도 그랬었다. 종 호한 테는,

"선생님, 좀 어떠셔요?" 했고, 박건이 있게 된 후로는,

"선생님, 뭘하셔요?" 하고 묻는 말이 달랐을 뿐이요, 의도는 똑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재덕이 남매 사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재덕의 조부와 모친과도 합의를 보아 박건 남매를 진숙이네 집에다 불러들이기로 정식 결정이 된 것은 그런지 며칠 후다. 재덕의 부친 신구영 씨는 해방 직후에 그런 봉변을 당한 후로는 대부분 서울에 가 있어서 집안 살림에 별로 참견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만 일로 서울에까지 승낙을 맡을 필요는 없었다.

"잘됐다. 재덕이 남매도 종호 그 사람이 간 후론 꼭 짝 잃은 비둘기 같아서 보기 싫더니만 ─"

진숙이 모친도 되레 대견해했고 재덕이 조부 장도,

"거 박건인가 하는 그 청년이 심지가 깊더구나. 한문두 유식하구. 종혼가 그 사람은 사람은 진국이래두 본데가 적더니, 이 사람은 그렇지도 않아. 사람은 역시 뼈다귀가 있어야느니. 거 저희들 집안두 토반은 아닌 모양이 더라… "

이렇게 수월하니 승낙을 했다.

다만 좀 까우롱해하는 것이 재덕이의 처 보임이뿐이라, 보임이는 별 흠은 없는 사람이나 머슴녀석처럼 무뚝뚝해서 나는 줄 모르게 재덕이 눈 밖에 나 버린 터라, 젊은 여자가 집에 들어온다는 것이 반갑지가 않은 눈치다.

"넌 어떠냐? 온 집안이 다 좋아야지."

시어머니가 이렇게 의견을 물었을 때,

"제가 뭘 압니까. 어머님께서 하실 탓이죠."

반대는 아니나마, 입맛이 써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사실 또 남편이 달가워하지 않는 며느리의 ─ 거기다가 웬일인지 결혼을 한지 삼 년이 되도록 아이 낳이도 하지 못하고 있는 며느리의 말이란 설 까닭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마침 경애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미군들이 판 초콜릿과 파인애플 한 통을 사들고 온 기회에 동산에 올랐다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었다.

재덕은 전후 경과를 이야기 하고서,

"그래서 내일부터는 자네네 남매를 우리집에서 납치하기로 했네."

"……"

그러나 뜻밖에도 박건은 멍하니 쳐다보기만 한다.

"이의가 있는가 모르겠네만, 납치란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니, 요새 애들 문자로 오케이 하게나."

그래도 박건은 말이 없다.

그는 멀리 바라다보이는 강 위의 돛단배를 바라다볼 뿐,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자리가 무색해졌다.

"옳지, 이 사람이 재갈을 안 먹이구 뒤로 결박을 하지 않아서 납치 당하는 맛이 안 나는가보군그랴."

어색한 장면을 들거우느라고 재덕이는 이런 소리까지도 했던 것이나, 박건은 힐끔 누이의 얼굴빛을 한번 훔쳐보았을 뿐, 그대로 강물만 내려다보고있다.

경애는 옆에서 애가 쓰이는지 젖먹이 옹아리 같은 묘한 소리를 내며 자리를 고쳐앉고 고쳐앉고 하고 있었다. 자리를 고쳐앉을 때마다 안간힘 하는 소리를 일부러 내어 오빠더러 남의 호의를 무시하지 말라고 귀띔을 하는 모양이다.

재덕이 남매는 까닭을 몰라서 더 말을 붙이지도 못하고 있다. 이윽고 박건의 입이 열렸다.

"좋아!"

그는 마치 군대에서 상관이 부하를 용서하듯 이렇게 침묵을 깬다.

"좋아. 자네가 만약에 그 청년운동인가를 그만둔다면."

'무슨 뜻이지?’ 하는 듯이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살핀다.

"내가 청년운동을 그만두면?"

"응."

"?…"

"자넨 인저 손을 뗄 때야. 나 보기엔 자네의 청년운동은 일종의 도락이야. 것두, 아주 위태로운 ─""그렇게 뵈나?"

"응!"

"그렇게 뵈일까?…"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청년운동이란 낚시 없는 고기잡이와 같지. 기초 공부두 하지 않고 짓는 벽돌집과두 같구. 일종의 센티멘틀이야, 센티 멘 틀."

재덕은 끝까지 말을 시키느라고 일언반사 대꾸도 항의도 않았다. 그는 또 계속 해서, "자네 식의 청년운동은 해방 초기 약 한 달 동안으로 족했느니. 그러나 지금은 해방한 지 벌써 일년이 지났네. 자넨 접때 인제 겨우 청년운동의 기 반이 닦아졌다고 좋아하데마는, 그게 센티멘틀리즘이란 말야. 로 맨 티즘이란 대두 좋지. 자네들은 놈들과 싸워서 이긴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데마는 그것은 이 시대가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야. 씨름은 위에 있는 놈이 이기느니, 자네넨 지금 놈들 밑에 깔려 있어. 지금은 무력으로 버티지만 정세가 한 번만 홱 변하는 날이면 아무것두 없네. 아무 것두."

박건은 발 앞에 있는 꽤 커다란 돌을 집어서 언덕으로 내리굴리더니, 그 돌이 강에 떨어진 후에도 한동안이나 강을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야 또 덤덤히 입을 여는 것이다.

"재팔을 치구 나팔을 불구 하는 거나 일반야. 정말 구경거리가 재미있어야지. 재팔루 암만 사람을 많이 모아놓았댔자 재미없으면 다 흩어지구 마는 법야… 자네네 청년운동은 이거야. 아니, 자네네뿐만 아니지. 남쪽에 와 보니 전부가 그래. 이런 청년운동을 몇 백 년 했댔자, 탱크나 몇 대 몰고 들어오면 그만야. 그만 와르르 부시지고 말지. 자네네 청년운동은 미국식 무기를 토대루 한 운동이지. 무기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야. 살 수도 있구, 빌릴 수두 있구. 이북에서는 ─ 저놈들은 달라. 놈들은 미국식 최신식 무기보다도 더 위력이 있는 공산주의란 무기를 가졌거든."

박건은 갑자기 말을 뚝 끊고서 벌떡 일어난다. 몸을 부쩍 솟구쳐 수백 척이나 되는 절벽 밑으로 거꾸로 굴러떨어지려는 것 같은 몸가짐이었다.

"앗!" 하고 그 순간 여자들은 비명을 올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박건은 몸을 솟구치지 않았다. 그 대신 성난 사나이처럼 홱 몸을 돌이키며 거의 부르짖듯이 하며 주먹을 번쩍 드는 것이다.

"무기에는 무기로! 생산에는 생산으로! 그리고 사상에는 사상, 주의에는 주의로 ─ 이래야만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이래야만 우리는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는 실성한 사람과도 같았다.

"그러나 봐라. 이 남쪽에 무엇이 있느냐? 생산이 있느냐? 사상이 있느냐? 주의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다! 조직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없다. 청년 운동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없다. 오직 있다는 청년운동은 조직도 없고 지도 이념도 없는 난장판이다! 이남에게서 버럭질한 무기 한 가지만으로써 놈들의 생산과 놈들의 무서운 조직과 주의와 사상을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 한다는 것은 '다께야리’와 목총으로써 B29를 떨어뜨리자고 서둘던 일 본 놈들보다도 더 어리석다!"

박건은 할말을 다 했다는 듯이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무도 그 의말에 대항하는 사람이 없자 산 위의 공기는 갑자기 차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진숙이가 입을 연다.

"선생님은 ─"하고 진숙은 낯부터 빨개지며 혈색이 그대로 내비치는 조그만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경련시키며 말을 시작한다.

"선생님은 우리 이남에는 주의도 사상도 없다고 하셨지만, 우리에게는 버젓한 민주주의가 있지 않습니까?"

진숙의 이 말을 듣자, 박건은 그 억센 손바닥으로 남실거리는 처녀의 뺨따귀를 후려친 것 이상으로 진숙을 윽박았다.

"뭣이라고요? 민주주의? 민주주의라구? 그따위 주의 개나 줘 버리십시오!"

뺨을 맞은 것 이상으로 진숙은 무색했다.

"민주주의란 통일된 국가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주의입니다. 통일된 민족, 통일된 이념, 통일된 사상 ─ 이것이 없는데 어떻게 민주주의가 살 수 있던가요?"

"그렇다면 그건 전체주의지요!" 하고 진숙이도 지지 않았다

"통일과 전체는 다르지요. 통일된 사상과 통일된 지도이념이 없는 민족 이 어떻 게 국토가 통일되기를 바랄 것입니까? 그것은 꿈입니다. 그리고 한 민족이 사상적으로 통일이 되었다고 그것이 전체주의란 난 모를 소립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히틀러와 뭇솔리니의 파시즘이 그 민족의 통일된 사상 이었던가요? 아닙니다. 이 통일은 민족 단위면서도 세계 민족의 사상과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민족 단위로도 통일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흩어진 민족을 통일할 수 있는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통일 된 지도이념을."

"그래서 우리는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나도 재덕 군이 관계하는 청년 단체에 몇 번 따라가 보았지만, 공산주의는 나쁘다고 주장합니다. 나쁘니까 버려라 명령합니다. 그러면 뭣을 줘야지요. 뺏은 공산주의 대신으로 다른 것을 주어야 하잖습니까?"

"민주주의를 주고 있지요."

"또 그놈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문화가 극도로 발달된 민족에서만 적용이 됩니다. 우리두 문화민족이라구? 우리가 무슨 문화를 가졌습니까? 수백 년 동안 당파싸움한 것도 문화입니까? 36년간 왜놈들한테 종질하구 이 간질 하구 살이 살을 베어먹구 한 것 ─ 이것두 문화 속에 드는가요?…"

박건은 말을 뚝 끊고 솔잎을 한줌 북 뜯어다가 질겅질겅 씹어 뱉고 씹어 뱉고 한다. 부글부글 끓어올라오는 격한 감정을 이 텁텁한 솔잎 물로 진정 시키고 있는 듯싶었다. 아까까지도 아물아물하니 보이던 범선(帆船)이 어느새 그들의 발 밑을 지나가며 수건을 흔들어댄다.

"저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신선처럼 뵈일 거라… "

짐짓 딴사람이 된 것처럼 박건이 중얼거린다.

"우리 눈에는 저 사람네가 신선처럼 보여지는데… "

"그러니까 자넬 붙드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았으니까, 우리가 어떤 길로 나가야 할 것을 잘 알 것이 거든." 하고 재덕이가 처음으로 입을 연다.

"공산주의가 어떻게 나쁘냐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주의가 얼마나 좋으냐 가 문제겠지. 인간이란 사상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일세. 사상이 없이 살다가는 우리 민족은 노예가 되지. 끽 잘된댔자 쥬가 되구. 돈에만 녹아나서 전세계를 국가도 민족도 없이 유랑하는 유태인이 ─"

"그러니까, 박 군!"

"아니야. 자네 뜻도 잘 아네. 허나 난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 자네나 내나 할 것 없이 새 이념 ─ 공산주의를 억누를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 될 이념 ─ 이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지도자로서 나서서는 안되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대중을 속이는 짓이지. 민족을 속이고. 이 통일된 지도이념이 없이 막연히 민주주의 하고 돌아다닌다는 건, 한개 의 영웅심밖에 안 돼. 영웅주의지!"

"그러면 자넨 그 주의 ─ 자네 말마따나 지도이념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우리의 역사 속에서 ─ 우리 민족이 오천 년 동안 걸어온 전통과 생활과 관습 속에서 ─"

"그것은? 그 전통과 관습은?"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오천 년간 우리 민족이 가장 전통을 살렸고 가장 비약을 했고 가장 통일되었고, 그리고 가장 놀라운 문화를 자랑한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고 ─"

"옳은 말야." 하고 재덕은 무릎을 탁 쳤다.

"그만큼 통일되고 문화가 발달되고 가장 긴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것은 그들이 그만큼 위대한 지도이념을 가지고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 지도이념을 가졌었기 때문에만 그들은 통일될 수 있었고, 통일 되었기 때문에 또 문화를 고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요, 그렇게 문화 가발 달이 되었으니까 긴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믿네."

"옳아!"

재덕은 또 한번 감탄했다.

"신라겠군!"

"신라! 역사로나 문화로나 가장 위대했던 신라! 서라벌(徐羅伐)!"

박건은 시처럼 읊는다.

"오! 신라여! 나는 그대를 그리노라… "

그들은 저녁놀이 백사장을 벌겋게 물들일 무렵에야 몸을 일으켰다.

박건은 재덕이 남매의 청을 물리쳤지만, 그들의 거리는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았다.

더욱이 진숙이에게 그러했다.

5

날이 거듭하고 박건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질수록에, 박건에게 대한 진 숙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거의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기도 하다.

"그이 눈은 참 이뻐!"

왕방울 같은 눈동자에 사암해 보이기만 하는 겉눈썹, 심술이 잔뜩 곪긴 두 눈등 ─ 어디로 보아 아름다운지 모르겠으나, 진숙이는 가끔 이렇게 박건의 눈을 찬미하는 것이다.

"말할 땐 그대루 폭포구!"

이것은 그의 정열적인 성격을 예찬하기 위한 말이겠지만,

"그이는 마치 끓는 기름가마 속에서 뛰어나온 사람 같아 ─"하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숙이가 종호를 아주 잊은 것은 아니다. 박건한테 대한 친밀감은 종호한테 느꼈던 친밀감과 별로 차이가 없다 해도 성질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종호에 대한 애정을 한 여성이 남성에게 대해서 느끼는 애정이라 한다면, 박건한테 대한 진숙의 애정은 오라비에 대한 누이의 애정, 스승에게 대한 제자의 애정이었다.

'그이와 일생을 같이 사귄대도…’ 하고 진숙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이와 일생을 같이 사귄대도, 나는 영원히 그이한테서는 남성을 느낄수 없을 것이다. 그이도 내게 그런 것을 요구 않겠지마는, 설사 그이가 내게 그것을 요구한대도 ─ 가령 종호처럼 키스를 요구한대도 나는 응하지 않으리라. 아니, 그이도 절대 그런 일이 없겠지 ─’ 이 두터운 믿음이 마음놓고 박건한테 가까이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종호를 생각할 때 진숙의 가슴은 역시 뛰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이미 한줌의 흙이 되었을 종호(진숙이는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건만, 그의 모습을 눈앞에 그릴 때 그 긴 키스가 가져다주던 흐뭇한 애정에 진숙은 울고 싶도록 그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자기 손에 자기 손을 얹어 볼때도 진숙은 따뜻하던 종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순진한 여성의 첫번 키스란 이렇게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한 여성의 일생이란 이 첫 키스를 위해서 바치는 생애의 전부로, 이 첫 키스에 대한 끝없는 의무 이행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그친다.

어쨌든 불과 한 달 남짓한 동안에 진숙은 박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친밀 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는 박건과 경애가 다같이 진숙이네 집에 와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종호를 잃은 뒤로 재덕이는 사실 인간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사상적으로도 여간 고독을 느끼고 있지 않았었다. 종호한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종호한테 진 셈이었고, 또 자기의 사상이 그가 신봉하는 공산주의에 참패를 본 것 같은 일종의 굴욕감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당시의 정치는 실로 말이 아니었다.

군정이 들어오면서 끽소리를 못하고 있던 왜정 시대 인물들이 정당을 끼고 들고, 실정을 모르는 단순한 군인들을 매수해서 갖은 모략과 중상, 음모를 다 할 때다. 살인 방화를 하기 위해서 칼을 갈고 화약을 준비하는 공산 당원들을 목격 하고서도, "현행범이 아니니까, 생각만 한다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생각은 자유니까.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니까 ─"

이렇게 단속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라, 모든 생산 기관은 영어 할 줄 아는 위인들이 독점을 하다 시피 해서, 금처럼 아껴야 할 기술자와 전문가들은 양담배를 팔아서 그날그날을 연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치도 그랬다. 반벙어리 영어로 '하우스’ 보이 노릇을 하던 사람이 데꺽 도지사다, 군수다, 어디 국장 과장을 차고나가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 다.

교육계 또한 그 지경이었다.

양심적인 교육자들이 날마다 등차급수로 뛰어올라가는 물가에 견디다 못 하여 학교나 관청에 취직운동을 하러 '장’ 자리를 찾아보면, 자기가 가르친 학 생일 때는 있음직도 한 일이겠지만, 해방 전날까지도 자기가 가르치던 재적 생인 경우도 있었고, 과장이라고 회전의자를 빙그르 빙그르 돌리고 앉은 사람이란 것이 자기가 과거에 데리고 있던 말석 부하가 보통이요, 사동으로 부리던 아이가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 ○ 주식회사 사장이 누군가 했더니, 저 있잖나, 마루덴이란 스시 집 이다바루 있던 바루 그 녀석이."

이런 소리도 있었고,

"동양 목장 우유 배달이 경찰서장이 돼 갔다면서?"

이런 말도 떠돌았다.

그리고 또 개중에는 풍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기는 왜정 때는 모두 숨어 살았으니까 우유 배달이 경찰서장도 될 수 있겠고, 스시 집 이다바가 큰 국책회사 사장 될 자격자도 있었겠지만, 애국자들이 그렇게 많았다고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깨판야! 깨판!"

이것이 당시의 정치를 말하는 일반 백성들의 민성이었다.

"깨판이라니까!"

이러한 남쪽의 혼란이 공산당원들에게 좋은 욕 자료가 되어주고도 있었던것이다.

"이북엔 정치를 잘한다는데 ─"실로 조직적인 공산당의 선전에 속아서 살 수 없는 백성들은 누구나 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정말 살기가 어려워지면 혹은 공산당을 알아도 이북으로 월북 을해 가고 ─ 이런 판이었다.

가장 영리하다고 하던 송종호도 물론 그중의 한 사람이다.

"박 군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사상을 가져야 한다. 남이 자기네 감정에 맞게 만든 사상과 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전통과 생리에 맞는 우리 의사상을 찾아야 한다. 역사에서 ─ 그렇다. 우리 오천 년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천 년 왕업을 이은 신라에서!"

지금 재덕이가 두고두고 생각하는 것이 오직 이것이었다.

공산주의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의 사상! 주의! 지도이념!─ 이것을 찾고자 목이 말라할수록에 지금의 재덕에게는 박건이 필요했다.

'오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박 군을 보내어선 안 된다! 박 군을 잡자. 그리고 신라만은 늘 연구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신라의 옛 터전 경주도 한번 가리라 했다.

재덕은 한번 경주 구경을 한 일이 있었다.

벌써 십 년 전 중학 때 수학여행으로서였다. 그러나 지금 보는 경주는 다르리라 했다. 아무것도 없는 빈터에일망정, 신라의 향기가 풍겨도 풍기고 호흡이 느껴져도 느껴지리라 했다.

그래서 박건과 경주행을 결정했다. 새재를 넘어서 안동으로 빠지면 걸어간 대도 이틀이면 족한 거리다.

"오빠! 경주 가신다지! 우리두 가요? 네, 경애 씨두 그렇구, 나두 언 제 경주 구경 했어요? 여비는 우리가 쓸 테야, 정말!"

"계집애들이 뭘 이 소란한 세상에 ─ ?"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재덕이는 동의했던 것이다. 진숙이나 경애도 청년 운동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을 아는지라, 경주를 보여서 해는 없으리라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일 새벽에는 도보로 새재를 넘어서 안동까지 가기로 작정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뜻 아니한 사건이 돌발했다.

내일 떠날 준비를 한다고 오후에 읍내로 나간 채 재덕이는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열시가 열시 반, 열시 반이 열한시, 다시 자정이 지나도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다.

온 집안이 안대청에 웅기중기 모여앉았었다. 뒤미처 경애도 들어왔고 박건도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대로 날을 밝힐 작정이었다.

한시가 지난 때서야 청년단에서 사람이 왔다. 되레 부장(선전부장)이 무사히 집에 계시냐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오?" 하고 박건이 되묻자 그는 허리를 척 접어 탄식을 하며, "이 거 큰일났습니다! 놈들한테 납치가 됐나봅니다!"

"납치가 되다니?"

"필시 그런가봅니다."

부장(재덕)은 분명히 단장, 부단장과 아홉시에 헤어져서 댁으로들 돌아갔는데 자정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단장 집에서 기별이 오더니 부단장 집에서도 기별이 왔다는 것이다.

근간 놈들이 폭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정보가 여기저기서 떠돌고 있을 무렵 이었던 지라, 가족은 더욱 긴장이 되었다.

"그럼 경찰엔?"

"연락이 되어 있습니다."

"경찰에서도 모르던가?"

"모르고 있습디다. 지금쯤 아마 동원됐을 겁니다. 비상소집이 내리는 것을 보고 왔으니까요. 단에서도 조직부장님 명의로 비상소집을 내렸습니다."

박건은 그 단원과 같이 가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온 집안이 벌벌 떨기만 했지, 이렇다 할 방도가 나서지 않는다. 더욱이 진 숙이는 소위 그놈들의 '숙청’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을 안 후다.

그들은 모여앉은 채 날을 밝히었다.

새벽 다섯시는 되어서 형사 하나가 단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어제 입고 나간 옷과 가졌던 물건, 신발, 모자 일체를 알아가지고 가더니, 그날이다 시 저물도록 아무런 정보도 없다. 박건 남매와 진숙이도 종일 드나들었지만 아무런 단서조차 얻지 못하고 돌아오곤 한다.

"죽은 게야."

모친이 털썩 주저앉는다. 보통 노파 같았으면 벌써 온 동리를 뒤집어 엎었으련만, 이때까지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었다. 이제 맥이 탁 풀리고 만 모양이다.

이튿날 아침 식전 연못가에 나갔던 경애가 웬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연못둑 걸상에 놓여 있더라는 것이었다.

편지란 일종의 통고문이다. 일부러 만들어서 쓴 글씨일시 분명한 꼬불꼬불 한 연필 글씨로, "가장 악질적인 반동분자, 신재덕 놈의 가족에게 고하노라."

이런 서두로써 시작된 편지는 명일 자정을 기해서 악질적인 반동분자 신재 덕 놈을 숙청할 것이니, 내일 안으로 관과 기타 장사에 필요한 일체 준비를 끝내고 대기하라는 문면이다.

박건이가 이 통고문을 가지고 경찰에 뛰어가니, 단장과 부단장의 집에도 똑같은 글씨와 내용의 통고문이 왔다고 마침 와서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부단장한테 온 편지에는 '색마’라는 두 글자 가더 들어 있다는 것이다.

부단장은 색마 소리를 들을 만큼 여자 관계에 추잡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보아서는 무심히 넘겨버릴 수 있는 이 두 글자가 수 사 주임한테 는 신기한 영감을 준 모양이었다.

그는 무릎을 탁 치고서,

"오라 잇!" 하고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이때부터 내일 자정까지는 불과 사십 시간밖에 남지 않았었다.

수사주임은 비수처럼 잘 드는 박 형사의 김 부장을 부단장의 고향인 S 면으로 보냈다. 고향에서 단서를 못 얻거든 부단장의 토지가 있는 동리를 모조리 조사하라고 지령했다.

"이놈은 반드시 여자로 해서 부단장과 원한이 있는 놈이다. 지금 와서 이런 원한을 표시하는 것을 보면 필시 소작인이거나 집에서 부리던 놈이나, 안 그러면 돈에 애여서 제가 좋아하는 계집을 뺏겼든지 무슨 관련이 있는 놈일 것이다. 이 점을 잘 캐치하라구!"

다음 한 가지 단서란, 편지 봉투 귀퉁이에 묻은 흙빛이었다. 황토빛 조 대 흙, 이런 흙이 나는 데는 대개 일정하니, 주로 토굴을 수소문해보도록 했다. 근방에는 금광이 성한 지방이라 토금굴이 있는 곳을 각별 탐색케 했다.

경찰과 청년단원 해서 이십여 명이 각지로 파견되었건만 그날 해가 지 도록 아무런 단서도 발견치 못했다.

이제 희망을 붙일 사람은 오직 김 부장과 박 형사뿐이었다. 밤 열시나 되어서 농군으로 차린 김 부장과 박 형사가 돌아왔다는 보고가 단원으로부터 단 본부에 들어왔다.

단 사무소에서 밤을 새우기로 한 박건과 진숙이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어떻게 되는가요?"

진숙은 박건의 손을 잡고 흔들어댄다.

"가만히 계십시오. 내 좀 알아보고 오리다." 하고 단장실로 들어가더니 얼마 만에야 나와서 지금 모처로 또 파견이 되어 나갔다는 이야기뿐이다.

그날 밤도 그대로 밝고 말았다.

아침을 먹으러 집에 오니 혜영이가 와서 집안일을 돌보아주고 있다가, 진 숙이를 보더니 정원 뒤로 끌고 간다.

"좀 물어볼 말이 있어."

"뭔데?"

"우리집 양반이 어서 들었다고 그러는데 ─"하더니 갑자기 말문을 돌린다.

"저 진숙이네 집에 있던 사람 있지?"

"지금두 있지, 왜?"

"그이가 이거야?" 하며 엄지와 둘째손가락으로 고리를 지어 보인다.

한때는 '돈’으로 쓰여지던 이 암호는 지금 와서는 공산당원으로 쓰여지는 터다.

"아니, 누구 말야. 경애 오빠 말야?"

"아니, 경애 오빤 웬. 경애 오빤 내가 몰라서?"

"그런데 왜 그래?"

"글쎄 말야. 이거냐 말야?"

"글쎄, 모르겠어. 오빠 말눈치로는 혹 그렇지 않나 싶기두 하구 ─ 허지만 지금 우리집에서 나갔는데 뭐."

"글쎄, 누가 그걸 모른다나베? 그이가 지금 어디 있어?"

"왜?"

"글쎄 말야."

"그이 ─ 죽었어!"

"뭣이? 죽어? 언제?"

"한 달포 전에."

"어디서?"

"아, 글쎄, 왜 그러는 거야. 이야기를 해야 알잖아? 이건 형사 심문하 듯이 제 말만 자꾸 내세우네나."

"그이가 죽 ─ 었 ─ 다?"

여전히 혜영이는 자기 말만 하고 있다.

"왜 그래, 글쎄?"

몸이 달아서 진숙이가 달구치니까,

"그럼 아냐, 우리집 양반이 잘못 들었나보아."

"뭔 소린데 그래? 바루 들었든 삐뚜루 들었든 얘길 해줘야 알잖나베. 그래, 그이가 어쨌다는 거야?"

"우리집 양반이 어느 좌석에서 들었다는데, 이번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 진숙이네 집에 있던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이 있어서 그래. 허지만 죽었다는 사람이 어떻게 ─ 아마 누가 모르고 그런 말을 내돌린 게로군 그 랴."

혜영이 남편은 농업학교 영어선생이었다.

해방 전에는 제천 국민학교 촉탁으로 있다가 영어 실력이 있으니까 농업 학교로 온 것이다. 연희전문 출신으로 특히 영어에는 숙달하다.

경애가 혜영이네 집에 와서 있게 된 것도 경애도 같은 단양 학교 촉탁으로 있었던 관계로 혜영이와 친해진 터다.

"거짓말야!"

진숙은 비로소 안심을 했다. 사랑과 우정과 민족까지 배반하고 나간 사람 이기는 했지만 종호한테 그런 욕을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야? 그이는 흙이 돼도 벌써 다 됐을 건데 뭐. 이번 오빠가 서울 가서 오래 되지 않았수? 그때 오빠 손으로 묻구서 왔대요."

"아이 참, 세상에, 헛소문두 참 잘 나지? 정말 그런 거짓말 퍼뜨리는 놈은 생사람 잡잖겠네나."

아침을 먹고 들어와 보니 역시 이렇다는 단서도 없다는 것이다.

그날도 온종일 진숙이는 읍내에서 살았다. 경찰서에서 청년단으로, 청년 단에서 경찰서로 ─ 이렇게 되풀이하다 보니 또 해가 진다.

놈들이 말한 자정이란 이제 불과 너덧 시간밖에는 남지 않았었다.

이 바쁘고 경황이 없는 중에도 진숙의 머리에는 피뜩피뜩 종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혜영이의 한 말이 어쩐지 귀에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그럴 수가 없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여기를 와서!’

처음에는 이렇게 종호를 싸고돌다가, ' 설사 살아 있다기로서니 그이가 설마 여기 와서 그런 짓이야 할라구. 다른 사람두 아닌 오빠를!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오빠까지야 그러지는 못하겠지!’ 그러나 이런 생각과 동시에 혜영이 이야기를 들은 뒤로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의혹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오빠의 말대로 정말로 송종호가 죽고 말았는가 하는 의심이다.

오빠가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혜영의 말을 들은 후로는, '그게 정말인가?’ 하는 의혹이 떠오르는 것은 그 자신으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종호가 살아 있기를 비는 것은 아니다.

'그 살뜰하던 우정과 사랑과 그리고 의리를 배반한 사람!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만 사람 ─’ 이렇게 생각할 때 차라리 오빠의 말대로 아주 죽어버리기나 했으면 오죽 좋으랴 했다. 이미 썩어서 흙이 다 된 사람을 가지고도 엉뚱한 소문이 떠도 는데, 그이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 이었다.

아니, 그가 살았다면 정말 또 민족에게 무슨 큰 죄를 질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그만 정도로 죽었기를 비는 마음 ─ 이것도 오로지 일생에 첫번 키스를 바친 처녀의 기원인 동시에 의무 이었을것이다.

'종호 씨여, 다시는 깨어나지 마사이다! 당신을 극진히도 사랑하는 신진숙을 위해서 ─ 그리고 우리 삼천만의 불쌍한 민족을 위해서…’ 단 한 번의 키스의 의무란 이렇게도 과중한 것이던가?… 6

"지대장 동무! 반동분자를 압송해 왔습니다?"

언제나 돼지 불알 까는 소리를 치는 늙은 원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지는 대원의 보고에 지대장 이성식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동안 깜빡했던 모양 이었다. 그 깜빡하는 동안에도 그가 헤맨 꿈나라의 세계는 실로 아름다운것이었다.

"에이끼, 이 망할 자식! 이눔의 새끼야. 그렇게 일러도 몰라! 왜 보고를 할 때는 조용히 들어와서 내 지시를 받은 담에 하라구 몇 번이나 일렀냐, 이 자식아!"

"지대장님, 지대장님 ─ 이렇게 두 번이나 불렀십니더!"

"이 새끼! 무슨 잔소리야. 보고는 조용한 소리루 하라구 몇 번이나 일렀냐. 거 돼지 불알 까는 소리를 해가지구."

"타구난 목청이 그래서 안 그렇십니껴?"

"가라, 이 자식아!"

지대장은 곤한 낮잠을 깨워놓은 늙은 원숭이한테 화풀이를 하고는 신문지에 만 담배를 피워문다.

"어쩌랍니껴?"

"뭘 어째?" 하다가는,

"응, 데려와! 어딧 놈이냐?"

"늑골이락 합디다만, 이 반동새끼 입을 딱 봉하굴랑 딱 안 씨부립디더."

"달구쳐두?"

"아이갸, 막무개냅니더. 직인다 직인다 해봐도 이를 딱 물고 눈만 껌벅껌벅 합디더."

"좋아. 부대장한테 넘겨!"

"부대장님한테 넹기까예?"

"그래!"

늙은 원숭이가 나가자 지대장은 소리를 버럭 질러서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켠다. 느른하던 몸뚱이에서는 여기저기서 소리가 난다.

"망할 놈의 새끼, 남 좋은 재밀 보는데 그 새끼가 ─ 에잉!"

좋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머리고 수염이고를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어서 그렇지, 나이도 끽해야 이십 칠팔 세 밖에 안 되어 보인다. 이마도 번듯하고 코도 성큼하니 희어멀건 얼굴이다. 단장만 하고 나면 때도 훌떡 벗어 보임직한 것이 판무식쟁이는 아닌 성싶다.

지대장은 피우던 담배를 바위 위에다 쓱쓱 비벼 꺼서 귀에다 끼우고 문 밖으로 나간다. 문이라야 큰 바윗돌을 세워서 정면에서 보이지 않도록 가린것이다. 출입은 좌우로 하게 되어 있다.

소나무 사이로 아물아물하게 단양 읍내가 바라다보인다. 읍내 뒷산 너머로 바랜 광목을 넌 것 같은 꾸불꾸불한 흰 줄기는 한강 상류다.

"과연 아름답군."

지대장은 일본 하꼬네 온천촌을 생각게 하는 읍내를 바라다보며 지 대장 답지 않게 센티멘틀해진다.

벌써 저녁들을 시작하는지 뽀얀 젖빛 연기가 자옥하니 읍내 상공을 덮고있다. 읍내라기보다도 어떤 깊은 산골의 농촌다운 고요한 정취다.

곧 닭의 우는 소리라도 늘어지게 들려옴직하다.

"저기가 태봉이라던가?"

지대장은 부드러이 흘린 산줄기 위에 동그마니 선 둥근 봉을 바라본다. 태봉의 흙을 오지 항아리에다 잡아 넣고 석 달 열흘만 정성을 들이면 남자를 보지 않아도 잉태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는 봉우리다.

"태봉 ─"

지대장은 눈을 스르르 감는다. 벌써 십오 년 전 가섭산에 원족을 가서 내려다보던 고향의 조그만 마을이 마음에 떠오른다. 나무치고는 초라한 나무이나 쭉쭉 하늘로 뻗친 포플러가 그림에서 보는 어항을 생각게 했었다.

"바다를 한번 보았으면… "

그때 열세 살 소년이던 그는 책과 그림에서만 본 바다가 몹시 보고 싶다고 생각 했었다. 갈매기란 얼마나 큰 새인가? 제비처럼 생겼으니 제비만 할 게라 ─ 이런 공상을 하면서 바다의 한 포구 같은 자기 마을을 내려다보던 생각이 불현듯 난다.

"고향 ─"

그는 가만히 이렇게 불러본다.

그러자 고향이란 부드러운 음향이 또한 그를 소년 시절로 끌고 간다. 분이 생각이 났다. 이름 그대로 저녁에 핀 분꽃처럼 해사하니 예쁜 처녀였다. 귀 밑 머리를 신식이라고 넓적하게 땋아서 흡사 인형같이 귀여운 아이였다.

"분아!

"뭐?"

"너 나한테 시집 안 올래?"

"아이, 매친 자식. 이 자식아, 매쳤다구 너까짓 자식한테루 시집을 가?"

"그럼?"

"난 눈깔사탕 집으루 간다!"

분이도 열세 살, 그도 열세 살 때였다.

지대장이 이런 달콤한 추억에 잠겨 있을 때 바로 근처에서 잡는 소리가 난다.

순간 본능적으로 소름이 쭉 끼친다.

그러나 지대장은 금세 자기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아, 내가 왜 이렇게 센티해질까? 잡을 놈은 잡아야지! 목을 자를 놈은 자르고 배를 가를 놈은 가르구! 톱으로 썰어도 직성이 안 풀린다. 쥑일 놈들! 반동분자! 미 제국주의의 주구들!"

지대장 동무는 토인들의 추장과 같은 걸음새로 소리나던 자리를 찾아간다. 지대 본부인 굴 바로 뒤쪽 깊숙한 골짜기에 십여 명이 둘러서서 아까의 반 동 분자를 잡고 있었다.

송곳 찜질을 하는지 반동분자는 장맛날 능구리 우는 소리를 하고 용을 쓴다.

그러나 피에 주린 산사람 지대장의 귀에는 폭폭 졸림을 청해주는 고요한 음악처럼 들린다. 직직 긁히는 축음기 소리를 좋다고 물 한 잔에 삼백원이나 주고 사먹는 소위 도시인들의 취미란 것이 얼마나 천하냐 싶다.

"좋은 음악야. 위대한 예술이야."

지대장은 반동분자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부대장!"

지대장은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고함을 쳤다.

"예 ─"

"빨리 오시오."

부대장이 올라왔다. 풍기에서 푸줏간을 하던 백정이다.

"뭐야, 그놈이?"

"바루 이리 동네서 반장질하던 놈입니다."

"악질루 굴었나?"

"악질이면 이만저만한 악질인가요."

"그럼 없애."

"예 ─"고 깃 덩이 문 개처럼 신이 나서 뛰어내려간다.

"잠깐!"

지대장은 또 불러 세우고,

"알았지? 내일 밤! 인저 며칠 안 남았으니까. 내일은 최후로 계획을 짜야거든."

"예 ─"

"내일은 매우 중대한 회야!"

"예!"

지대장은 굴속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몸을 내어던졌다. 장대에다 미인들 쌀 포대로 만든 것이다. 침대도 되거니와 들것으로도 쓰여진다.

"지대장님, 식삽니다."

방울 같은 소리다.

"어, 좋아!"

열일곱 살 난 간호 동무다. 산에 들기 한 달 전만 해도 풋내가 물씬 거리 더니, 하두 치여나니까 그런지 이제는 제법 방둥이가 방파줌하니 바라지고 젖가슴도 월등 부풀었다.

"너 있다가 잘 때 좀 와!"

"네! 지대장님, 용무 마치고 나갑니다!"

"너희가 뭘 안다구!"

지대장은 한번 픽 웃어보는 것이다. 무지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두려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새삽스럽다.

이튿날 밤, 어두운 지 얼마 아니하여 근방에 흩어져 있는 각 분대 로부터 대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닷새를 앞둔 10월폭동의 최후 타합을 하기 위해서였다.

회장은 지대장의 침실이요, 이 지대의 총본부인 동굴 속이다.

맨 처음으로 당도한 것이 제3분대장, 다음이 5분 대· 6분 대· 1분 대· 4분 대·2분대의 순서다.

2분대장이 맨 끝으로 본부에 당도한 것이 아홉시 반, 어둡기 전에 떠나야 겨우 대어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주위에는 별일은 없겠지만 척후가 다섯이나 섰다.

"다 모였소?"

지대장은 좌중을 쫙 둘러보고서 치하를 한다.

"밤길에 오느라고 수고들 했소. 별일들 없었지?"

"없었습니다. 한 놈 만났으면 했더니 그림자도 못 보겠군요."

똑떨어진 서울 말씨는 P중학 5학년생, 제3분대장이다.

"수고들 했소." 하고 다시 한번 치하를 하고서,

"오늘 모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계획을 거사하기 전에 최후 타합을 하기 위해서요. 서울 각 분대장 동무들은 요전날 지령대로 다 이행을 했을 줄 아니까 되풀이하지 않겠소만, 그날 밤 자정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해주시오. 민활하고 용감하게 ─"

지대장은 분대장들이 갖다준 양담배를 피워문다.

"준비가 다 못 된 분대 있소?"

아무도 대답이 없다.

다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좋소. 그런데 우리가 명기해야 할 것은 한 장소에 집결이 되지 말 것 이오. 놈들의 수효는 우리의 10분지 1도 채 못 되니까, 분산적으로 쳐들어 가란 말요.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자기가 맡은 일 이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 것. 요전 이월달에 우리가 실패한 원인이 관청을 습격할 책임자들 이 반 동 분자 집을 치러 갔으니 말이 되오? 이번에는 물건이고 돈이고 절대로 평균 히 나누어 줄 것이니까 부잣집으로만 몰키지 말고 자기가 맡은 분야만 딱 딱 지키란 말야."

이날 밤, 지대장이 지시한 상부의 지령이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제1 목표는 감옥에 둘 것. 습격하는 즉시로 죄수 동무들을 해방해서 군중에 합치케 할 것.

2. 제2 목표를 경찰, 군청, 조합, 은행 등 관공서에 두되, 민첩하게 방화하고 물건, 현금 기타를 운반하지 말 것(단, 현금은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구출케 할 것).

3. 작성한 살인명부에 순번을 매겨서 질서정연케 할 것. 숙청 차례는 첫째 가 군청급 군인가족, 둘째 그 지방 가장 악질적인 반동세력의 지도자급 부호, 청년단의 지도급 일체, 그다음에 구장, 반장 등 순서로 할 것.

4. 양식 기타 식료품은 가급적 약탈해서 운반시키되 운반이 불가능한 분량은 방화할 것.

5. 처단 방법은 되도록 처참을 기하되 최소한도의 시간을 소비할 것.

이 다섯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상벌로서 다음과 같은 지령이 전달되었다.

1. 각 군, 각 면, 각 동에서 상부 지령을 가장 충실히 이행한 동무로서 군수, 서장, 조합, 은행, 감옥, 학교 등 공공기관의 장으로 삼는다. 그 밖은 그 동무의 성적 여하로 자리를 결정한다. 농민 동무는 그 성적에 의해서 토지를 분배한다.

2. 사정, 태만, 기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령 이행에 태만한 자는 반 동 분자 로서 규정한다.

"알았소, 동무들?"

"네."

"그럼 좋아! 최후로 절대 동일한 시각에 거사할 것임! 또 한 가지, 이 것은 기밀에 속하니까, 거사 직전에 동무들께 공포하겠소. 이날 거사를 하면 우리의 붉은 군대는 38선을 돌파해서 혁명을 완수하기로 되어 있소. 이상."

회의가 끝난 때는 돼지고기에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때 부락에 파견한 보급부대가 벌써 돌아온 것이었다.

─ 이리하여 영남 일대의 대폭동은 발단이 된 것이다.

소위 10월폭동이란 것이다.

이 폭동은 실로 용의주도하게 계획이 되었었다.

모두들 붉은 세상으로 변하는 줄 알았다.

이날 ─ 10월 7일을 전후하여 대구·부산을 위시한 광주, 전주, 충청도의 공주, 청주, 안동, 단양, 풍기 등 대소 도시에 일제히 폭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날의 읍내는 더욱 처참했었다. 5만 읍민이 곤히 잠든 자정을 기해서 읍 주위를 포위한 '동무’떼들이 읍을 향하여 물밀듯 하자 읍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패와 각 기관에 파묻혔던 공산당원들이 일제히 합세를 했던 것이다.

읍내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십여 군데서 불길이 충천 했고, 불꽃은 붉은 노래에 맞추듯 기세를 올렸다.

찌르고 자르고, 쪼개고 가르고, 갖은 방법으로 애국자와 양민들이 처단 되었었다. 아우가 형도 죽였고 아들이 아버지도 죽였다. 아재비가 조카도 죽였고 조카가 아재비를 처단했다.

장님의 장치기와 같은 혼란이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때렸고 누가 누구 인지도 모르고 죽였다.

"저놈을 쥑여라." 하면 피에 주린 ─ 동족의 피에 주린 군중들은 까닭도 모르고 그쪽으로 몰리었다.

폭도가 몰리는 곳에서는 반드시 함성이 일었고 함성이 인 곳에서는 또 반드시 그 누군가가 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놈의 눈깔을 빼라!"

"와!"

"그놈은 배를 갈라라! 창자를 내라!"

"와!"

피를 본 군중들은 마치 고깃덩이를 찾아 날뛰는 개 같았다. 어쩌다 소 뼈다 귀를 찾아낸 개들처럼, 눈도 없고 코도 없는 목을 장대에 꽂아들고 좋아라고 날뛴다.

온 천지가 어둠이어야 할 그믐밤은 낮처럼 밝다. 사방에서 충천하는 불길 때문 이었다. 불이란 사람을 흥분시킨다. 불에 흥분한 인간들은 또 불을 질렀다.

전 시가에 불이 붙었대도 밤은 역시 밤이다. 거기에다 피를 본 인간의 눈은 다 뒤집혔었다. 수천의 인간이 어둠 속에서 치고 찌르고 법석을 하자니. 어느 놈이 원순지 어느 놈이 폭돈지 알 길이 없어졌다. 폭도가 폭도를 치고 양민이 양민을 찔러댔다. 쫓고 쫓기고 패고 찔리는 동안에 양민들도 본성이 뒤집히었다. 흥분된 인간의 눈에는 모두가 적으로 보인다. 평시에 담배 한개 달라는데 거절한 이웃사촌도 원수요, 물꼬에서 말다툼한 친구도 대 천 지 원 수로 보였다.

그래서 또 패고 찌르는 소동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혼란이 만 이틀 동안이나 계속된 것이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경찰이 다시 읍내를 접수했을 때도 아직 시가는 타고있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코를 막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냇내 뿐이아니다. 그 냇내 속에는 시체 타는 냄새가 섞여져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높고 맑고 흰 구름장만이 무심하니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도 마음이 있었던가보다. 폭동이 진정되던 날 밤 이 슥 해 서부 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행한, 아니 그보다도 불쌍한 민족을 위 해서울어 줌이었으리라.

아, 무지여, 몽매여. 이 겨레로부터 하루바삐 물러가거라.

7

그러면 이날의 폭동을 진숙이네는 어떻게 겪었던가?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재덕이가 납치되었던 그뒤 이야기를 하는것이 순서일 것 같다.

그날 ─ 놈들이 통고한 사형 집행 시간인 자정보다 네 시간 전인 열시까지에 경찰과 청년단이 입수한 정보는 이러했다.

부단장 구창수 씨의 고향인 S면 탑동에서 지난 이월의 폭동사건 이후 행방을 감춘 청년은 모두가 셋인데, 그중 하나는 지금 공주에서 복역중이요, 나머지 둘은 이월에 집을 나간 뒤로 통 소식이 없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전혀 여자 관계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사람 들이었고, 더욱이 부단장 구창수와 여자 일로써 감정을 상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대는 다시 구창수 씨의 대대 묘막이 있고 저수지가 있어서 낚시질 차로 자주 가던 동면 방우리라는 동리로 파견이 되어 갔었다.

구씨의 땅 백여 석지기를 관리하는 사음의 아들 박봉길에게 일단 의심의 화살이 쏘아졌다.

이제 박봉길에게 대한 김 부장의 보고를 들으면 다음과 같다.

"박봉길은 금년 만 삼십세로 농업학교를 졸업한 자로, 그의 처 분식이와 지 주인 구창수와의 사이를 의심하여 처를 수차 구타한 사실이 있었음.

그런데 동 박봉길의 처 분식은 평시부터 남편인 박봉길을 좋아하지 않는 말투 였고, 구창수 씨가 낚시질로 며칠씩 묵어간 일도 있었음.

급기야 분식은 남편을 버리고, 해방이 되자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추었음, 그래서 박봉길은 구창수 씨더러 처를 찾아내라고 힐문한 사실도 있었음."

"부단장 부인이 밖에 와 있나?" 하고 수사주임은 부하를 시켜 구씨 부인을 청해다가 이 사실에 대한 진상을 물어보았다.

"있습니다."

부인은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서 이것을 시인했던 것이다.

"전후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하루는 봉길이가 찾아와서 집양반보구 제 처를 어디다 감추어두었느냐고 힐난하는 것을 본 일은 있습니다."

"부단장이 그 집에 자주 간 것은 사실인가요?"

"자주랄 것은 없지만 봄으로부터 가을까지에 매해 두세 번씩은 갔을 겝니다."

"한번 가서 대개 며칠씩이나?"

"길어서 사오 일, 그렇지 않으면 하루 이틀이었을 겝니다."

"좋습니다. 나가십시오."

수사주임은 박봉길의 집에서 압수해온 필적을 감정하기 시작했다. ㅁ과 ㅂ 이 정확치 않은 것이 그의 필적의 특징이었다.

이 특징은 만들어 쓴 글씨에도 역연히 나타나 있지 않은가.

필적의 주인공은 박봉길임에 틀림이 없었다. 범인이 박봉길이라는 것도 비로소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자정까지에 불과 세 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이와 동시에 또 한 가지 유력한 단서가 드러났다. 수십년 동안 금광 덕대로 굴러먹은 노인이 이 근방에서는 조대흙이 섞인 황토흙이 나는 토굴은 비봉 산 중턱에 단 한 군데밖에 없다는 것을 단연했다는 것이다.

대기하고 있던 무장대에 즉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특별수사대 오십여 명을 떠나 보낸 후, 그들이 돌아오기까지의 여섯 시간을 진숙이와 경애는 꼬바기 경찰서 추녀 밑에 서서 있었다. 어디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그들의 귀는 토끼처럼 쫑긋해지는 것이다.

"안심하고 돌아가시지요. 부인께서 여기 계시다고 안 될 일이 잘 되겠십니까?" 하고 어디 말씨인지 보초 순경이 몇 번이나 돌아가기를 권했으나 진숙은, "괜찮습니다. 집에 간대도 잠이 올 것두 아니구요." 하고 길래 버티었다.

단장과 부단장 집에서는 삼모자가 다 나와서 같이 밤을 새웠다.

이 초조한 여섯 시간 동안에도 진숙은 피뜩피뜩 머리에 떠오르는 종 호의 기억에 자기 자신이 싫증이 났었다. 잊자 잊자 해도 혜영이가 하던 말이 머리에서 사라지지가 않는 것이다. 까닭은 없으나마 진숙은 지금 종호가 죽은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이가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 하고 진숙은 불을 들고 화약에 접근하는 심정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란다면, 혜영이 남편이 들었다는 이야기대로 종호 씨가 이번 사건에 관련이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을까? 마음으로 딛고 순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내게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종호 씨가 아닌 가. 이북이 생지옥이라고 한대도 자기에게 대한 나의 애정이 변하지는 않을것 임을 잘 알면서도 나를 속인 종호 씨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수록에 혜영이 남편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점점 실감을 가지고 그에게 육박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믿는 오빠이면서도 이때껏 말하지 못한 무서운 비밀을 진숙은 갖고 있기도 한 것이다. 종호는 이 읍내에서 경찰서장과 군수보다도 청년 단장과 부단장을 더 미워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놈의 새낀 그저 빵 ─ 해야 하는데!"

종호는 웃음엣말처럼이었지만 이런 소리를 여러 번 했었다.

"내가 여기를 뜰려고 하는 이유의 하나는 ─"

종호는 이렇게도 말했었다.

"그 두 새끼가 보기 싫은 것도 이유의 하나야. 만일에 재덕 군이 청년 단에만 관계해 있지 않았다면… 설사 그렇다 해도 내가 재덕 군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않았대도 그 자식들은 벌써 없어졌지. 날랐을 겝니다."

"아이, 선생님두. 왜 같은 동포끼리 그렇게 남을 미워하셔요?"

"동포? 동포라구요? 천만에! 내게 처단할 권리를 준다면 경찰서장 열 하구두 안 바꾸지요."

그때는 무심히 듣고 넘긴 이런 이야기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꾸 진 숙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이다.

"가야지. 내가 여기 더 있다간 재덕 군한테도 화가 미칠지두 몰라."

서울로 가기 바로 이삼 일 전에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고 언제던가 한번은 아주 농담처럼, "또 누가 압니까. 이 다음 내가 여기 반동분자를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 올지? 진숙 씨두 괜히 뭐니뭐니하고 날뛰지 말아요."

"선생님 손에 심판을 받으면 더 좋지 뭘 그러세요."

진숙은 정말 농담인 줄만 알고 이렇게 웃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때는 단순한 농담으로만 여겼던 이런 말들이 모두 가시가 돋친 말이었던가도 싶었다.

진숙은 그만 몸서리가 쳐졌다.

"무서운 사람! 무서운 인간!"

진숙이가 이렇게 부르짖으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데,

"오는군!" 하고 단장 부인이 뛰어가는 것이다.

그들도 얼결에 단장 부인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가도 그럼직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진숙은 발을 멈추었다. 역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몇 홰째인지 닭 우는 소리가 나서 시계를 보니 아직 시계 바늘이 보일 만큼 밝지는 않았다.

뒤미처 쫓아온 부단장 부인이,

"와요! 와요! 저기 와요 "하고 팔을 내저으며 가리키는 앞쪽을 바라보니 정말 신작로가 빡빡하니 몰려들 오고 있다.

─ 그러나 그들이 맞은 것은 오직 두 개의 시체뿐이었다.

한 시신은 사람으로서는 이 이상 더 참혹하게 죽일 수는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었다. 몸에는 헝겊 오라기 한 오리 걸쳐져 있지 않은 알몸뚱이다. 전신이 그대로 옴두꺼비처럼 부푼 것은 곤봉 같은 것으로 무수히 구타한 자리였고, 시커멓게 탄 채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자리는 쇠 같은 것으로 단근질을 한 자국일시 분명했다. ─ 부단장 구창수의 시체다.

또 한 시신은 별로 상한 자리는 없었으나, 두골이 세 조각으로 나누어져있다. 도끼와 같은 그 무슨 흉기로 대매에 머리를 쳐서 즉사케 한 모양 이었다.

─ 이것은 단장 이배근의 시체다.

"선전부장은 어떻게 됐을꼬?"

시체를 우선 경찰서 무도장에다 옮겨놓고 사람들은 둘러선 채 서로들 맞 쳐다본다.

그러나 본 사람이 없으니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간밤 자정이니 어쩌니 한 것도 빨간 거짓말이요, 단장과 부단장은 납치 되어 가던 날로 피살이 된 모양이었다. 수사대가 갔을 때는 놈들은 한 녀석 그림자도 없고 오직 현장에는 피에 젖은 종이쪽지 한 장만이 떨어져 있었 더라는 것이다.

"신재덕 놈의 장례식은 더 며칠간 보류하라!"

"박봉길이란 놈에 틀림이 없다!"

박 형사가 부르짖었다.

"그놈이 아니면 장례식이니 보류니 하는 말을 쓸 놈이 없다!"

필적을 감정한 결과 박봉길의 집에서 압수해온 필적과 이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황급히 썼던 모양이다.

"선전부장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데려간 게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는 사람도 있고,

"이용 가치는 무슨 이용가치! 어디 다른 데로 끌고 가서 해쳤겠지."

"허지만, 해친다면 같은 자리서 해쳤겠지, 누가 무서워서 다른 곳으로 해치러 갔겠나."

그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어쨌든 그놈을 잡아야지! 그놈 나두 얼굴은 알아. 그놈이 중학교 때 축구를 했느니. 되잖게 늘 겨드랑에 책을 끼고 다니면서, 읍내 누굴 찾아다니는지 가끔 나오던데. 삿갓만한 밀짚모자를 쓰구선, 왜 걸음새도 별나게 으쓱 대지, 어깨를 이렇게 추썩이면서 ─"그때다. 누가 소리를 꽥 지르며 진숙이한테 달려들었다.

그러나 진숙이는 나무토막처럼 허리도 굽히지 않고 빳빳하니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진숙이를 붙잡으려던 사람도 몸의 중심을 잃고는 그대로 진숙이 몸 위에 엎 드러지고 말았다.

"딱하지! 며칠 밤을 새운데다가 저런 꼴을 보았으니, 약한 여자 마음에 기절을 않구 견디겠나."

"자칫하다간 신씨네 두 초상 나잖겠는가."

진숙이가 여섯 사람이 손을 맞잡아 만든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뒷공론들을 했다.

"내 그렇잖아두 용한 여자두 있다구 탄복을 하던 길일세. 글쎄, 며칠을 통 먹지두 않더래. 그러구서 용히 버티었지. 기운이 없는데다가 저런 꼴을 보니… "

모두들 그렇게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실 또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진숙이가 기절을 한 것은 이러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청년 단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진숙이도 그 박봉길인가 하는 사람을 두세 번 본 기억이 있는 듯이 생각되었던 것이라, 겨드랑이에다 노상 책을 끼고 다닌다는 말에, '책? 겨드랑이에 책?’ 하고 어딘선가 자기도 그런 사람을 보았거니 생각하던 끝에, 삿갓만한 밀짚모자를 썼다는 소리에 기억이 선명해졌다. 보통 것보다도 전이 갑절은 되는 밀짚모자에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명동 거리에서 곧잘 보는 불량학생이나 '어깨’ 패들처럼 으쓱대며 걷던 사나이 ─ 진숙이도 그 젊은 사나이를 본 일이 있었다. 아니, 진숙이와도 잘 아는 사람과 함께 중국집에서 어깨를 맞대다시피 하고서 나오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그날도 겨드랑이에 무슨 책인지 책을 끼고 있었다.

"똑똑한 청년입니다. 책도 많이 읽고 ─"

청하지도 않는데 그 잘 아는 사람은 진숙이한테 그 청년을 소개했었다.

진숙이는 그저 남한테 소개할 때 흔히 쓰는 말이겠거니 가벼이 들었고, 그 뒤로는 길에서 한두 번 엇지난 일은 있었지만, 인사를 한 것도 아니요 별 흥미도 없었던지라, 그대로 지나친 채 잊어버리고 말았었다.

지금 진숙은 책과 전이 넓은 밀짚모자와 으쓱댄다는 걸음새에서 그것이 바로 박봉길이란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날 진숙이한테 그 청년을 소개한 잘 아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송종호 바로 ─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진숙은 도립병원 분원에 입원을 하자 아주 영원히 숨을 거둔 듯이 자꾸 자기만 했다. 늦어도 두세 시간 후면 깨어난다고 의사는 아무 걱정 없는 듯이 말 했었으나, 오후 두시가 지나도 깰 줄을 모른다.

진숙의 머리맡에는 모친과 박건 남매가 언제나언제나 하고 잠이 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가 이것이 자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없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아닐까?"

모친은 어쩐지 이대로 아주 죽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다 보였더니 의사는 그대로 내버려두란다.

진숙이가 겨우 오랜 잠에서 깬 것은 다섯시가 훨씬 지나서다. 진숙은 말끄러미 어머니와 박건, 경애 ─ 이렇게 둘러보더니 무슨 뜻인지 생그레 ─ 웃고서 다시 눈을 감는다.

그 길로 다시 두어 시간을 자는 것이었다.

진숙이가 온전한 제정신으로 돌아간 것은 여덟시가 다 되어서다. 그 제 서야진 숙은, "나 퍽 잤지, 어머니?" 하기도 하고, 지금이 몇시나 됐느냐고 묻기도 한다.

"진숙아, 너 여기 어딘지 아니?"

"응."

"어디야?"

"병원이지?"

"그렇다, 그렇다!"

어머니는 갓난것이 처음 엄마 소리를 했을 때처럼 기뻐했다.

"여기가 병원이야, 병원!"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대견해하는 것이다.

이날이 바로 10월 7일, 그 무서운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진숙이가 미음을 마시는 것을 보고 박건 남매는 우선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에는 칠십 노인에 여자와 아이들밖에 없는지라 허전해서 보낸 것이다.

진숙이가 미음을 마시더니 다시 잠이 들기에 모친도 자리를 잡아 누웠다. 아들 생각이 가슴에 사무쳐 궁성대다가 겨우 어렴풋이 잠이 들 무렵에 갑자기 병원 안이 소란해진다.

"아이구, 뉘 집에선지 또 걱정이겠다."

진숙 모친은 급한 환자가 와서 그러거니만 여기고 다시 잠을 청 하려니까, 아무래도 공기가 수상하다. 일어나서 불을 켜보나 안 온다. 그래서 간호 부방을 뚜드렸더니 캄캄한 방에서 간호부들이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기만 한다.

"왜 이리들 소란하우?"

책망 비슷이 묻는 말에,

"왜가 뭐예요, 할머니. 큰일났어요. 이북 빨갱이들이 쳐들어왔답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며칠을 두고 놀라기만 한 가슴인지라 금방 눈앞부터가 캄캄해지고 만다.

간호부들은 서로 부르고 법석이다.

"아이구, 어떡하니! 진작이나 알았다면 어디루 피하기나 했지. 부원장 놈이 죽일 놈이야. 명색이 사내란 것이 저 혼자만 살짝 달아나?"

"아니 얘, 그따위 소린 인제 해서 뭣한다니. 어디루든지 가야지."

"어디루 가?"

"아무데나 갈 테야, 난."

금방 뛰어나갈 듯이 하던 간호부는 밖을 내다보고서 어떻게 하느냐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전 시가가 그대로 불바다요 죽여라 소리가 거리에 흩어졌다.

이때 또 한 간호부가 달려와서 지하실로 오라는 것이다.

"색시들, 우리 딸두 좀 데리구 갑시다."

그러나 대답도 않고 와 몰려나간다. 하는 수 없이 진숙 어머니는 병실로 와서 곤히 잠을 자는 딸을 일으켜 더듬더듬 지하실을 찾아가 보니, 환자에 간호 부에 이십여 명이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지하실에서 진숙 모녀는 복부 수술을 해서 촌보도 못 움직이는 부인네 하나와 완전히 이틀을 지냈던 것이다. 물론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폭동이 진압되던 날 새벽, 이 부인네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 었다.

"극락으로 가시오."

진숙이 모친은 손수 환자의 눈을 쓸어주었다.

8

"어디로 가는 거요?"

"어디루 가는 건 네가 알아서 뭣해!"

"그래두 가는 데나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잔소리 말아, 이 자식아!" 하고 고함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어깻죽지를 내려친다.

재덕은 또 입을 다물밖에 없었다.

갈수록에 산은 깊다. 새벽달이 있다고는 하지만 달빛도 샐 틈조차 없이 솔이 우거졌다. 그것도 아름드리 노송 같았으면 그래도 하늘이 보이련만, 이삼십 년의 어린 나무들이라 가지도 성하거니와 잎도 무성해서 아무리 가야 별도 보이지 않는다. 길이 있을 리 없다. 놈들은 자기네의 손·발이 자유로운 생각만 했지, 재덕이가 뒤로 결박을 당한 데다가 발도 겨우 한 발자국 푼수를 남기고 발목을 옭아맨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조금만 떨어져도 종아리고 어깨고를 마구 후려친다. 기를 쓰고 따라가느라고 어쩌다 한 발만 앞을 서면 이번에는 앞선다고 또 갈겨댄다.

아랫종아리를 어찌도 후려치는지 앞서잔 것이 아니라 비틀대려니까 뒤에서 결박 끈을 후려채 비알에서 나둥그러진 것이련만, "이 자식이 어디를 달아나는 거야!" 하고 한 놈이 축구식으로 옆구리를 차자, "쥑여라, 그놈에 새끼!" 하기가 무섭게 세 놈의 뭇 발길이 들어온다.

몸이 자유롭고 육신이 성해도 따라갈 수 없을 텐데, 이 지경이니 자꾸 떨어질밖에는 없다.

목적지도 모르고 방향도 모른다. 달을 보아 새벽도 멀지 않았거니 할 뿐, 시간도 알 길이 없다. 끌려가는 까닭 또한 알 리 없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귀찮게 끌구 가라는 거야? 그 자리서 모두 없애 버리지 않구!" 하는 것을 보면 놈들도 자기네 의사가 아닌 모양이다.

"뉘가 안다나. 분대장이 대대장한테까지 데려다 주라니 하는 노릇이지!"

"분대장은 어디로 간다노?"

"내일 밤 일이 있잖아?"

분대장이란 것이 아까 부단장을 잡던 놈인가보다. 이름은 모르나 재 덕이도 분명히 어디서 여러 번 본 녀석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는 길로 곧 되짚어 와야잖나?"

"그렇게 되겠지. 내일 밤 일이 있으니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동면까지 가야 하네. 동문 읍이지?"

"읍이야." 하고 결박 끈을 잡은 놈이 대답한다.

'이놈들이 아까부터 내일 밤 내일 밤 하니 내일 밤에 대체 무엇이 있다는말인가?’ 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재덕이는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내일 밤에는 또 무슨 변괴가 있으려나보다.

"너, 이 속에 뭣이 들었냐?"

박 동무란 녀석이 묻는다. 재덕이한테서 뺏은 서류 봉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별것 없소."

"별것 없다?"

"보나 안 보나 우리들 죽일 살인명부겠지?"

재덕이가 하도 말 같지 않아서 대꾸도 않으려니까,

"안 그래?" 하고 재우친다.

벌써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너무도 끔찍한 꼴을 눈앞에서 본지라, 죽는 것은 겁날 것이 없었지만, 말을 않으면 또 팰 테니 걱정이었다.

"날이 밝거든 보면 알지 않겠소."

"글쎄, 그러니까 뭣이 들어 있느냐 말야?"

"회의록과 인쇄물이오."

"우리네 가족 죽이자는 회의록?"

"아니오."

"찢어 죽이겠느냐 발겨 죽이겠느냐 하는 걸 공론한 회의록이겠지?"

재덕은 대답을 않아 보리라고 못 들은 체해 보았다.

"네 이놈의 새끼들, 10월 보름날 우리네 가족들을 전부 몰살하기로 되어있다지?"

"오해요. 그럴 리가 있소."

"흥, 이놈의 새끼, 오해? 이놈의 새끼야, 우리는 귀 막고 사는 줄 아느냐? 네놈의 집에도 우리와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둬!"

"정말 하마터면 식구들 씨 지울 뻔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 대 천 지 원 수놈들아, 사상으로 싸우면 싸웠지, 어째서 가족까지 몰살을 하려 드는 거냐 말야? 네놈들보구 옷을 달라던? 밥을 달라던?"

"흥, 잘두 보름날 거사를 하겠다. 이놈아, 그전에 다 씨지는 줄이나 알아!"

재덕은 이제서야 이번 일의 윤곽을 짐작했다.

"당신네들이 언제 그런 소릴 들었는지는 모르겠소만 ─"

재덕은 이야기했자 소용이 없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이 무서운 오해만은 풀어주어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터이니 회의록을 보면 알겠지만 당신네 가족을 죽 이기는커녕 살인죄만 없는 사람이면 좌익두 전부 포섭하자는 결의를 했소. 어떤 철없는 구장과 반장이 좌익 가족한테는 요새 나온 쌀과 밀가루 배급을 주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해서 감찰로 하여금 조사케 한 기록도 있고, 그런 반장을 모두 파면하자는 결의문까지 있으니까 한두 시간 후면 알 것이 아니오. 죽기를 기약한 사람이 비겁하게 당신들 앞에 거짓말을 하겠소?"

이 말에는 놈들도 다소 의아한 듯이,

"어디 이따 밝거든 보자. 만약에 그런 결의문이 없는 날이면 너는 그 만이야. 아까두 봤지?"

"……"

"봤건 봤다구 그래!"

그러나 차마 대답이 나가지 않는다.

상당히 가파른 봉을 타고 올라가더니 놈들도 된지,

"좀 쉬어 가지." 하고서 털썩 주저앉으니까, 모두 따라 앉으며 아까 단장과 부단장의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들을 하나씩 피워문다. 성냥이 아니라 부싯돌이다.

재덕이도 한쪽에 쪼그리고 앉았다.

"북에서 며칠날 넘는다누?"

무슨 소리인지 하나가 이렇게 옆 친구를 보고 묻는다.

"여기가 내일로 되어 있으니까, 아마 어제쯤은 떠났을걸."

"어제 떠나서 되나? 38선 근방은 되지만 이 아래로는 내일 거사를 한다면 늦지. 뒤집어엎었다가 되뒤집히는 날이면 우리는 녹지 않나?"

"동무두, 아니 미리 들어와 있지 않아? 우리는 몰라두 읍내 변두리로는 벌써 수천 명 숨어 있을 거야. 말을 않지 대대장은 알구 있을걸."

"그래야지. 이북만 믿었다가 안 온다면 쪽박까지 깨어먹는 판이다. 젠장! 뭔고 대대장은 도지사가 되나."

"모르지."

"될 거야. 박 동무는 면장일 게구."

"기왕 할 바엔 서장을 주면 좋겠더라."

듣자하니 모두가 꿈속 같은 이야기다. 재덕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판 무식꾼들은 아닌 모양인데 이렇게도 어리석은가 ─ 재덕이는 그냥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문화 민족에게나 적용되는 거야. 우리는 계몽할 시대지 정치 할 시대가 아니네. 요새 보면 청년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알고, 또 그렇게 만들려고 하지만, 그건 잘못이야 ─"하던 박건의 말이 생각난다. 이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 나라를 세울 청년들인가? 일개 면장과 구장이 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한테 우리 배달 민족은 운명을 맡겨야 한단 말인가? 지금 공산주의 나라와 민주주의 나라들이 두 패로 갈려서 단병접전을 하는 오늘날, 구장과 면장과 경찰서장 몇만 죽이면 바로 이 세상은 자기네 세상이 되느니라고 생각하도록 단순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세워야 하고 다스리고 삼천만 민족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오늘날 우리 나라를 두 쪽으로 나누고 있는 38선은 미국과 영국, 불란서, 모든 서쪽 구라파의 민주주의 국가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가 서로 의논하고 만든 38 선인데, 이 것을 몇 사람의 힘으로 끊어버리고 혁명을 한다는 것인가? 김일성이 하나가 마음대로 이 천지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은 백성들한테, 정말 우리 삼천만 민족은 나라를 내어맡겨야 옳다는 말인가?…’ 재덕이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싶었다. 아니, 이 어리석은 백성들은 내일 밤에 무슨 거사를 하면 이북의 공산당이 와서 모두 면장도 시켜주고 구장도 시켜주고 경찰서장도 시켜줄 줄만 믿고 있는 것이다.

'거미줄에 비행기가 걸려 떨어진다고 믿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

이렇게 생각하고 세 녀석의 얼굴을 쳐다본 재덕이는, 이번에는 땅을 치면서 앙천대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쌍한 민족이었다.

깊은 산속에도 먼동이 터오는지 동쪽 하늘이 뿌옇게 걷혀온다.

"그만 가지. 나는 육십리 길을 되짚어 가얄 사람인데 ─" "육십 리? 말이 육십리지 산골짝만 더듬어 가는 데두 육십리여? 백리 길이 실해, 이 동무야."

"그렇다면 더군다나!" 하고 박 동무란 궐자가 일어서자 모두 따라서 일어난다.

재덕이도 죽기보다도 더 싫었지만 아픈 몸을 일으켰다.

날이 밝아오자, 그들은 더 깊은 골짜기로만 끌고 간다.

이제는 날이 아주 활짝 밝아오고, 골짜기에 차 있던 깊은 안개도 걷히기 시작 했다. 천이야 만이야 한 높은 산중이건만 어디서인지 물소리가 요란하다.

놈들은 주머니에서 인절미 같은 것을 제각기 꺼내어 먹는다.

재덕이도 몹시 시장했다. 그러나 그는 떡이 먹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떡은 그만두고 물이나 한 모금 먹었으면 할 뿐이었다.

재덕이가 목적지인 듯싶은 어떤 깊은 골짜기에 이른 것은 열한시나 가까이 되어서였을 것이다. 어느 놈 하나 일러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말투로 보아 거의 온 모양이다.

재덕은 어떤 큰 바위산 밑을 돌아서 반 평이나 됨직한 바위로 앞을 가린 석 굴까지 끌려왔다.

"여기 섰어!" 하고 한 놈이 들어가더니만, 얼마 있다가 도로 나와서,

"들어와!" 한다.

재덕이는 굴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반은 기다시피 하여 굴속에 들어가서 허리를 편 재덕이의 앞을 턱 가로막는 사나이가 있다.

"왔네나그려!"

그 사나이는 재덕이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다.

"아!"

뜻밖이었다.

재덕이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잘 왔네. 혹 실패하지나 않았나 해서, 퍽 걱정이 되었었네."

"옳지, 그러면 나를 납치시킨 것이 자네였네나그려?"

재덕이는 적의를 감출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됐네. 그러나 그건 우리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저리로 가세." 하고는 부하를 보고서 명령한다.

"이 동무의 결박을 끌러!"

"옛!"

"그리구 동무들은 나가 있어도 좋아."

"옛!"

사나이 ─ 송종호는 재덕이의 결박을 끌러놓고 부하가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려,

"놀랐나?"

재덕은 아무 말도 않았다.

"놀랐겠지. 자, 이리로 걸치게." 하고 생솔나무에 거적으로 만든 들것 같은 침대를 가리킨다.

"진숙 씨도 안녕하신가?"

재덕은 고개만 끄덕이었다.

"할아버지께서두? 어머니두, 부인두, 금녀두?"

이렇게 온 집안 식구의 안부를 묻고는,

"모두들 몹시 걱정할 게라!"

"자네 거 어떻게 아는가?"

자기를 잡아온 상대가 송종호라고 알고 나니 재덕이의 심사는 빗나가기 시작 했다.

"뭣을 말인가?

"내 집 식구가 걱정하는 걸 어떻게 아는가 말일세?"

"하하하하, 자네 몹시 노한 모양일세나그려. 왜 좋지 않은가. 그 개돼지 만두 못한 것들하구 날마다 싸우다가, 이렇게 공기두 좋구 전망두 좋은 고요한 산에 올라보는 재미두 나쁘지는 않지 뭔가. 자, 담배나 한 대 피우게. 참, 아침두 못 먹었을 테지. 이것두 좀 들구 ─"하면서 신문지로 덮었던 양재기 둘을 내놓는다. 백설기와 돼지고기였다.

"여기 물이 있네. 우리는 식사 시간이 일정해서 따로이 차리지는 못 하네 마는 좀 들게나."

"싫네, 난 자네한테 이런 것을 얻어먹으러 온 것은 아닐세. 이런 것은 자네들 부하나 두었다 주고 대관절 나를 잡아온 이유나 듣세."

"잡아왔다? 허 이 사람, 뭔 소릴 그렇게 하나?"

"잡아왔다는 말이 귀에 거슬리면 납치라구 하지."

"허, 그래두 그러거든."

"똑떨어지게 말해 두네. 난 자네하구 그런 농담을 하러 여기까지 끌려 온것은 아닐세. 자네 요구를 단적으로 말하게. 나의 눈깔인가, 귄가, 모가 진가? 내장 육분가?"

"허, 동무!"

"동무? 내가 자네게 동무가 될 것이 뭔가? 자네게는 나란 인간은 반 동 분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세."

"그럼 취소하지, 신 군, 재덕이!"

"반동이라구 불러라."

"그러면 반동!"

"말하게."

"자넨 날 오해하구 있네. 오해를 ─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 자네와 나는 ─""서로 적이다. 원수다!"

이렇게 감정이 엇나가가지고는 통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달았는지, 송종호가 멀거니 재덕이를 쳐다만 보고 있더니, "동무, 좀 쉬게. 요기두 좀 하구. 그리구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이야기 하기 루 하세나." 하고 일어서 밖으로 나간다.

얼마를 기다려도 종호는 들어오지 않는다. 재덕은 침대에 번듯이 누워 버렸다.

어느 땐지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잠이 깨었다. 정말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는 길로 머리맡의 물을 한사발 다 들이켜고 나니 정신 이 홱 돌아선다.

"푹 잤는가?"

담배를 피우고 앉았던 종호가 묻는다.

"여보게, 대장님!"

정신이 돌고 나니 또 본감정이 돌아온다.

"대관절 자넨 날 어쩔 작정으로 여기까지 잡아온 것인가? 단장, 부단장과 함께 깨끗이 죽여주지를 않고 어째서 여기까지 끌어오느라고 죽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고생을 시키는지 알 수가 없네. 자네 생각엔 혹 이렇게 나의 생명을 늘려주는 것이 내게 대한 호의로 해석하는지도 모르겠네만, 그야말로 무서운 오해일세. 나의 소원은 이런 방법으로 목숨을 늘리는 것보다도, 저 단장처럼 대매에 때려죽이든가 부단장처럼 지지고 찢고 눈깔을 빼고 해서라도 빨리 죽여주는 것이 내게 대한 호의일 것일세. 자, 말해주게. 내게다 이 이상 더 굴욕을 강제할 작정인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미리 앞질러놓으니 종호는 말문이 탁 막히는 눈치다.

"자, 어서 날 끌어내다가 도끼로나 단근질로 죽여주게. 나는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네."

"재덕 군! 좀더 진정하게. 자넨 흥분했어."

종호는 재덕의 손을 잡고 애원하듯 말한다.

"그런 건 자네가 알은 체할 바 아니야. 난 죽여줄 그 순간까지 다시는 자네와 이야기할 흥미가 없네. 자, 더 지체치 말고 죽여다오! 이제 내 입에서는 죽을 때의 마지막 비명 이외에는 절대로 나올 말은 없을 것이다!"

재덕이는 이렇게 선언을 하더니 정말 종호가 뭐라고 해도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재덕이!"

"……"

"자네는 날 오해하고 있네. 나의 본의는 자넬 해치자 함도 아니요, 자네게 모욕을 주자는 것도 아니었네. 그야 자네를 납치시킨 것은 날세.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네. 허지만 나의 본의는 자네에게 괴롬을 준다든가 자네를 해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만은 믿어주게. 자네를 해치기는커녕 이렇게 하는 것이 자네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괴로웠을 줄 알지마는 이렇게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일세."

재덕은 듣는지 안 듣는지, 여전히 바위처럼 앉았을 따름이다. 그렇건만 종 호의 이야기는 그대로 계속이 되고 있다.

"자네두 내일만 지나면 내 본의를 알아주겠지만, 자네가 오늘 밤 집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했을 것일세. 자네는 모르고 있겠지만, 내 일이 무슨 날인 줄 아는가? 내일이 바로 이남의 미군정을 우리 손으로 뒤집는 날 일세. 내일을 전후해서 남조선 전체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는 날이란 말야.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목표 등 큰 도시는 물론, 충청남북의 방방곡곡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날이야. 물론 자네네 읍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조 그만 동리까지도 일제히 일어날 것일세. 그러면 경찰대와도 충돌이 있겠지. 그러나 그까짓 경찰은 문제도 되지 않지. 경찰 속에도 모두 우리 프락치가 들어가 있고, 내일을 전후해서 이북에서 우리의 붉은 군대가 사태처럼 내리 밀릴것이네. 38선에서 부산까지 사흘이면 다 될 것일세. 이런 때 자네가 집에 있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거든!"

그래도 재덕이는 죽은 듯이 앉아 있기만 했다.

이것을 종호는 달리 해석했다. 이제야 재덕이도 자기의 뜻을 이해하고 고맙게 생각하는가보다 ─ 이렇게 자기대로 생각을 하고 용기를 얻은 것이다.

"물론 자네네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대강은 짐작을 했겠지마는 ─"종호는 슬쩍 재덕이의 낯빛을 훔쳐보고, 자기의 추측대로 재덕이가 훨씬 풀이 꺾였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일이 지나면 모레부터는 자네네 집에도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꽂힐 것 일세. 지금쯤은 자네네 읍 주위는 물론 읍내 속에까지 우리네 붉은 군대 가에 워 싸고 있을 것일세. 유격대가 거사를 하면 바로 정치공작대가 들어와서 정치를 맡고, 그 뒤를 이어 붉은 군대가 치안을 맡을 것일세. 이렇게 해서 11월 7일까지에는 총선거를 실시하게 될 것이야. 이런 것을 모르고 있는 자네를 나로서 어떻게 ─"고개를 푹 숙이고 듣고만 있는 것은 이제서야 자기의 우정을 이해하는 것이라 했다. 잽싸게 훔쳐본 재덕이의 얼굴에는 자기의 우정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는 표정이 나타나 보였다고 송종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호의 오해였다.

이 이상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다던 재덕이는 그 약속을 깨뜨렸다. 그는 자기 로서도 무슨 뜻이었던지를 이해치 못했을, 마치 성성이가 불시에 적을 발견 했을 때와 비슷한 외마디소리를 치기가 무섭게 ─ 아니 그 외마디소리와 함께 재덕이는 실로 날쌘 동작을 했던 것이다.

"쩔꺽!"

재덕이의 그 민활한 동작은 이런 음향을 내었다. 종호의 육신은 이 괴상한 음향에 맞추듯 호들갑스럽게 동작을 했다.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 침대에서 떼그르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이 지지리 못난 것!"

깨진 북소리 같으나 그래도 뜻만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재덕이가 고함을 친다. 그리고 벌떡 일어선다.

"좋다! 인민공화국 기가 꽂히는 역사적인 장면을 못 보고 죽어서야 되겠느냐. 난 간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굴 안에 다섯 명의 무장병이 쫙 들어와 차 있었다. 바지 저고리에 칼빈이 하나, 국방복 바지에 한복 저고리를 입고 M원을 멘 친구가 하나, 나머지 셋은 곤봉과 일본군도를 차고 있다.

그때까지도 채 일어나지 못했던 송종호가 벌떡 일어난다.

"쏘리까, 대대장님?"

"나가라!"

대대장은 발을 굴렀다.

"아, 썩들 못 나가느냐?"

그제서야 무장병들은 자기들을 보고 하는 말인 줄 안 모양이었다. 무장 병들이 물러 나갔다.

"잘 알았네!" 하고 송종호가 입을 연다.

"나도 더 말은 않겠네. 모두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니까. 그러나 자네가이 산에서 내려가겠다는 것만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네. 그것만은 각오 해주어야겠네. 그렇다고 긴 시간 자넬 여기에 감금해둘 의사는 없네. 모레 아침 ─ 늦어서 글피 아침이면 자네두 여기서 다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일세. 우리 그때까지는 여기서 같이 지내기로 하지.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네. 밖에도 나다니게. 눕고 싶건 눕고, 먹구 싶건 먹구, 이야기하고 싶으면 하구, 또 싫거든 언제까지나 입을 봉하구 있어두 좋네. 나두 자네가 청하지 않는 한 자네게 말을 거는 일두 없을 것이네. 자, 그럼 좀더 쉬게!"

송종호는 이렇게 늘어놓고서 천천히 굴 밖으로 나가버린다.

재덕이는 또 번듯이 누워버렸다.

정말 피곤했다.

9

생리적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는 한 시간보다도 더 긴 일분 ─ 이 지루한 일분을 예순 번 보내야만 비로소 한 시간이란 공간이 흘러간다. 이런 한 시간을 40시간이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다.

재덕이는 정말 이 40시간 동안 굴에서 단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소변도 굴 어귀에서 보았다. 약간의 백설기 부스러기에 물을 두어 모금 먹는 것이 음식물의 전부였다.

송종호도 그와의 약속을 잘 지켰다. 그도 대부분을 이 같은 굴속에서 뒹굴 면서 단 한 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줄 때까지 이 천둥 벌거숭이를 내버려두자 함이었으리라.

둘은 마치 일생을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않고 지내는 두 개의 바위처럼 간섭이 없이 지냈다.

그러나 드디어 때는 왔다.

역시 송종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재덕 군 자는가?"

재덕은 아무 말도 않았다. 누워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만하고 일어나 나가보세. 지금 각처에서 봉화가 일기 시작 했으니 ─"

밖에서도 서성대는 품이 봉화를 올리고 있는 눈치다.

그러나 재덕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안 나가보겠나?"

두번째 가벼이 흔들기까지 하더니만,

"그럼 누웠게나. 나만 다녀오지." 하고 나가버린다.

이 기나긴 사십 시간 동안에 재덕이의 생각은 딱 결정을 보고 있다. 놈들 앞에서 본능적인 비명이나마 아프다는 소리를 치고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자기 자신의 의사로서 죽으리라 한 것이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무한히 긴 시간이었던 것도 같았고, 또 무척 짧은 시간 같기도 했다. 재덕은 지금 완전히 시간에 관한 관념을 잃어버리고 있는 터였다.

"자네, 인저 좀 나가보지 않으려나?" 하고 또 송종호가 와서 말을 건넨다.

"지금 읍내가 그대로 불바다일세!"

그래도 재덕은 들은 체도 않았다.

또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역시 길었는지 짧았던지도 분간키 어려운 시간 이었다.

종호가 또 들어왔다.

"날이 활짝 밝았네. 읍내는 아직도 타고 있네.

재덕이는 이번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또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했다. 역시 하루인지 이틀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 시간이었던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오직 굴속이 어둡기 시작했다가 불이 켜지고 불이 꺼졌어도 그대로 밝은 채이고 한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재덕이는 요량도 못하고 있지만 그 지루한 일분 일분이 수천 수만이 흘렀던 것이다.

봉화가 일던 날 밤부터 만 닷새란 세월이 흘러갔던 것이다.

역시 재덕이는 누워 있었다.

공기가 달라진 것은 재덕이도 느끼고 있었다. 어제부터 몹시들 당황 해 한다. 서성대는 품이 다르기도 하다. 송종호도 전처럼 징커니 누워 있지도 못하고 들락날락 갈피를 못 잡는 모양이다.

"엥 ─"

무슨 짐승의 신음 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벌떡 일어서 나가기도 하고, 금방 또 들어와서 눕는가 하면 또 벌떡 일어서 나간다.

그때다. 몇 놈인지 황급히 들어왔다.

굴에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써 겨우 밤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대대장님! 빨리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단양, 충주 다 실패를 했습니다."

"풍기는?"

"풍기두 전멸입니다!"

"음 ─"

 

생략

[상기 저작물은 저작권의 소멸 등을 이유로 저작권 보호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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