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눈먼 사람들
갑오년 유월 열엿샛날과 열이렛날 이틀에 걸치어 서울에 와 있는 외국 사절( 使節) 들이 모여 외교단회의(外交團會議)를 열었다.
청국과 일본이 방금 조선에다 출병을 하여 놓고, 서로 물러가지 아니 하면서 그 충돌이 조모에 박두한 형편이니 거기에 대하여 외교단으로서 어떤 의논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외교단회의에서 영국 대표 맥도날드는 이런 안을 내놓았다.
첫째, 인천항과 서울을 국외중립지(局外中立地)로 선언할 것.
둘째, 서울과 인천 사이의 도로를 국외중립지로 선언할 것.
영국이 단순히 국제지대(國際地帶)로 볼 수 있는 서울과 인천을 청국과 일본의 교전지대로부터 빼어놓기 위한 뜻이었던지 혹은 청국을 편들기 위 한 계책 이었던지 그것은 모르되, 아뭏든 서울에다 주력을 이미 두었고, 종차 인천으로 좇아 후속부대를 상륙시켜야 하고, 경인도로를 현재 저의 군용 도로와 같이 쓰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요긴히 써야만 하였고 한 일본에게는 여간 이롭지 못한 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단박에 반대를 하였고.
청국은 멀리 아산(牙山)에다 군대를 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또는 조선 정부에 대하여서의 정치적으로, 일본에 비하여 자못 불편한 처지에 있는 터이라, 영국의 안에 크게 찬성을 하고.
미국 대표는 이런 중대한 문제를 독단으로 결정치 못하겠으니, 본국 정부의 지시를 기다려 대답하겠노라고 하고, 독일 대표는 인천을 중립지대로 하는 것은 찬성이나, 서울을 넣는 것은 반대라고 하고.
노서아편에서는 본국에 갔다 이튿날 인천에 당도한 웨베르가 영국의 안을 전부 반대하고.
이러하여 외교단회의가 아무 소득이 없이 흩어지고 말자 원세개는 최후의 희망을 잃고, 열여드렛날 새벽, 변복하고 승교 속에 숨어 서울을 빠져나가 인천으로 가서 군함 평원(平遠)을 잡아타고 본국으로 달리었다.
원세개가 서울로부터 종적을 감추고 없어진 것은, 곧 청국의 세력이 서울 로부터 물러났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청국 세력의 나래 밑에서 몸과 권세를 지탱하던 민씨네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 사대당은 정신이 아득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울 거리에는 삽시간에 소문이 좌악 퍼지고, 이 구석 저 구석 모여 수군덕거렸다.
원세개가 도망을 했다더라.
도망을 한 것이 아니라, 청국 병정을 몰고 와 일본 병정을 뚜드려 잡으려고 아산으로 내려갔다더라.
임오군란 때에 청국 병정이 하듯이, 이번엔 일본 병정이 서울서 한바탕 변을 일으킨다더라.
갑신년처럼, 청국 병정들이 들이닥치는 날이면 일본 병정은 몰살을 당하고만 다.
어떤 말에서든, 조만간 서울에 큰 변이 일리라는 것을 장안 안 백성들은 알아챌 수가 있었다.
서울은 상하가 발끈 뒤집히고 재빨리 안전을 도모하여 피난가는 무리로 거리는 물끓듯하며 혼잡을 이루었다.
이날 석양, 일본 공사 대조(大鳥)는 조선 조정에 대하여
1. 서울과 부산 사이의 일본군 군용전선의 가설을 승낙할 것.
2.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에 좇아, 일본군대의 병영(兵營) 설치를 승낙 할것.
3. 아산의 청병을 물러가게 하여, 조선이 독립국인 실증을 보일 것.
4. 한청수륙무역장정(韓淸水陸貿易章程)을 비롯하여, 청국과 조선 사이에 맺은 조약 가운데, 조선이 독립국인 사실에 저촉되는 것을 일체로 파기 할것.
이 네 가지 조목을 즉시 실행하도록 요구하되, 이십이일 밤 열두시까지로 기한을 정하여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산 중턱에다 대포(山砲[산포])를 주욱 묻어놓고, 경복궁으로 총부리를 대어놓았다. 종로 네거리에도 대포(野砲[야포])를 묻어놓았다.
요구를 듣지 아니하면 대고 짖어댈 테다 하는 위협이었다.
대포뿐 아니라 사대문과 그외 각 문에는 총 끝에 창을 꽂고, 사포 줄 내린 일본 병정이 파수를 섰다. 역시 총 끝에 창 꽂아 어깨에 멘 일본 병정 순라 대( 巡邏隊) 가 뚜벅거리고 다니면서 장안 안을 경계하였다.
그 서슬이 푸르고 기승스럽기란 당장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몰랐다.
일본의 요구를 들어 주자 하니 장차 청국의 보복이 두려웠다. 갑신정변 때에도, 임오군란 적에도 당한 전감이 있었다.
시방은 일본이 저렇게 독장을 치지만 원세개가 아무 때 와도 군사를 몰고와 일병을 때려 내쫓고, 다시금 조선조정을 호령할 것은 분명하였다.
그날에 가서 오늘날 청국을 배반한 치죄를 어찌 다 당하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자 하니, 당장 머리 위에 그 흉악한 대포 탄환이 날아와 떨어지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그만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본의 힘으로 청국 세력이 물러가니, 가만히 앉았다 수를 본 것은 일 본파( 日本派) 개화당이었다.
갑자기 큰기침을 하고 나섰다.
죽동(竹洞) 조희연(趙羲淵)의 집에 주인 조희연을 비롯하여 안경수( 安駉壽), 김가진(金嘉鎭), 권영진(權瀅鎭) 들의 개화당이 모여 1. 일본병으로 왕궁을 수비케 할 것.
2. 민비를 폐할 것.
3. 대원군을 섭정으로 맞아들일 것.
이런 결의를 하면서, 일병이 행동을 일으키기만 시각이 급하다 기다리고있었다.
민비를, 그가 국사를 어지럽히는 사대당 민씨네 파의 총수라 하여 물리 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일병으로 하여금 왕궁을 수비케 한다는 것은, 결국 늙은 범 청국이 앉았다 물러간 그 자리에 어린 삵괭이 일본을 모셔 앉힘과 다름이 없는 일 이었다.
따라서 나의 힘을 기를 겨를도 생각도 없이, 번연히 남의 힘을 빌어 반대파의 정권을 빼앗아 가지고, 남의 힘을 의지하여 그것을 지탱하려드는 데 있어서는 개화당도 결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무리(宗徒)이기는 민씨네 파보다 장할 것이 없었다.
일본파요, 문호개방을 도창하고 신문명의 수입을 부르짖고 하는 개화당에서 비록 임시방편이라곤 하지만, 배일파요 쇄국정치의 실행자요 보수 주의( 保守主義) 의 권화요 한 대원군을 섭정의 자리에 맞아들인다는 것은 천하의 웃음 거리가 되기에 족한 것이 있었다.
일본이 최후의 기한으로 정하여 준 이십이일 때마침 장마철이라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덮이고 날씨는 숨이 막히도록 무더웠다. 간간이 비는 구 죽죽 쏟아지고.
이런 일기조차 음울하고 불쾌한 가운데 장안은 피난 가는 무리로 혼잡을 이루면서, 조정에서는 아무런 결정도, 따라서 일본에 대하여 좌우간의 회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이십이일은 저물었고, 자정 열두시도 지나고 하였다.
그러고서 이십삼일.
겨우 먼동이 트일락말락한 첫새벽, 경복궁 뒤 신무문(神武門) 밖 송림 속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이 드디어 행동을 일으켰다. 꽝 하는 한 방 총 소리를 신호로, 궁 안으로 대고 일제사격을 시작하였다.
궁 안의 수비병도 응전을 하였다.
양편의 맹렬한 맞불질로 총소리는 콩볶듯 하였다.
궁중과 사대당의 민씨네 파는 몸을 떨었다. 백성들도 떨었다.
선용은 날이 아직도 다 밝지 않았고, 더구나 앞에서 궁장이 가리고 하여 총 질( 射擊)을 하기는 하면서도 헛심이 쓰였다. 뿐만 아니라, 실지로 적병( 敵兵)을 맞이하여 죽느냐 사느냐의 실전을 임하여 보기는 처음이라 그런지, 곧잘 총질이 뜻대로 되어지지가 않는 것만 같았다.
병정을 지원하고 영문에 들어가 훈련을 받으면서 종종 총질도 연습을 하고, 한 일 년 그러는 동안 제법 병정이 된 것 같았고, 한편 힘이 좋은 것과 위인이 순직한 것으로 웃사람의 눈에 괴어, 소대장(小隊長)으로 승차까지 하고 하였다.
시방은 그래서 삼십 명 일 소대의 장이 되어 그 삼십 명을 거느리고, 얼마 전부터 왕궁 수비를 와 하면서 이곳 북편을 담당하고 있었다.
막상 그러나 실전에 임하고 보니, 총질을 비롯하여 배하를 지휘하는 것이며, 모두가 평일에 생각더니와는 달리, 서투르고 뜻대로 되어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안존하여지지를 아니하였다.
차라리 바로 그 옆에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는 양으로, 아무렇게나 총을 쏘고 하는 늙은 군졸의 총질이 훨씬 자재(自在)롭고 잘 하며, 태도는 침착한 것같이 선용은 보였다.
미상불 그 늙은 병정은, 선용도 저의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 바 강화 병정으로서, 신미양요(辛未洋擾) 때에 벌써 실전을 치렀고, 이래 여러 차례 접전을 겪으면서 영문밥으로 삼십 년을 늙은 노졸이었다.
탄환이 왱왱 귓바퀴로 나는 실전 중이면서도, 선용은 사람이란 역시 무슨 일이고 오래도록 경력을 쌓을 나름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 둘, 상하는 군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어이쿠 하더니 늙은 강화 병정이 그 자리에서 앞으로 엎드러졌다.
선용이 놀라 기어가서 안아 일으켜 보니, 정통으로 가슴을 맞았다. 군복 위로 피가 내뿜기고 숨은 그새 벌써 지려고 하였다.
삼십 년, 탄환과 화약 연기 속에서 한목숨을 내던지고, 병정으로서 국사( 國事) 를 꾸준히 하여왔다. 당자 저야 나라를 위하는 뜻이 있어서 하였던지, 다만 생계를 도모하느라고 병정이 된 결과 제풀에 국사는 하여진 노릇 이었던지, 그것은 하여간 삼십 년을 두고 국사하고도 가장 중한 국사를 하여 온 것이었다.
하다가 그는 지금에 끝끝내 국사를 하던 중에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늙은 병정의 죽음은 그러므로 큰 죽음이요, 뜻깊은 죽음이어야만 할 것 이었다.
그러나 이 늙은 병정은 죽기까지 삼십 년, 국사에 무엇을 이 나라에 끼쳐놓았느냐.
그가 삼십 년을 하루같이 잘 입고 잘 먹고 하는 낙도 없이, 가정의 위안과 명일의 희망도 없이, 무우대가리같이 병영에서 혼자몸으로 구르면서 하루 세 때의 어설픈 병영의 밥으로 배를 채우면서, 이래 삼십 년, 탄환과 화약 연기 속에 목숨을 내던지고 그 소위 국사라는 것을 하여 온 것으로 인하여, 이 나라 이 땅에 끼친 바 공로가 과연 무엇이더냐?
들어오는 개화의 신풍조를 억지로 막아, 나라로 하여금 눌러 태고의 꿈속에 묻히게 한 신미양요의 강화 접전에 종군한 것이 이 나라 이 땅을 위 한 공로 일까?
대원군 한 사람에게는 공로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세 번 네 번, 지방으로 백성의 반란을 치러 갔었으니, 그것이 이 나라 이 땅을 위한 공로일까?
악정하는 세도재상과 양반들에게는 공로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로 이 나라 이 땅에는 공로랄 것을 끼친 것이 없지 아니하느냐.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져가는 늙은 병정을 무릎에 안고,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에 선용은 하염없기 다시 없었다. 동시에, 이 늙은 병정의 쓰잘 데 없는 죽음이 노상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선용은 병정이 된 것이 비로소 후회가 났다.
선용이 서울에 당도하기는 집을 나오던 임진년(壬辰年) 동지달이었고, 이듬해 계사년(癸巳年) 3월까지, 사직골 매부의 집에서 두류하고 있다가 병정 을 자원하고 영문으로 들어갔다.
반드시 병정이 되고 싶어서 된 병정인 것은 아니었다.
누이가 내외만 살고 있는 매부가 아니요, 양친이 구존한 시하가 되어 허물이 없지 못할 사돈집인데, 언제까지고 식객 노릇만 하고 있기가 민망할 뿐더러 무엇이 되었던 일에다 몸을 담가놓고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든 터라, 육체적 조건으로 보아 손쉬운 병정을 자원한 것이었다.
누이는 펄쩍 뛰면서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매부 영석도 반대하였다.
"병정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중임이요, 남아의 하 염즉 한 영광이요 하다는 것도 시방은 당치 아니한 말이라네. 잘못하다 개죽음 하기 쉬우이. 자네 같은 사람은 장차 쓰일 때가 있으니, 잠자코 좀더 있어 보게나."
이러면서 만류하는 것을 선용은 그때는 그때요, 우선 들어가 보겠노라고, 밑 져야 본전 아니냐고 하고 듣지 아니하였다.
그랬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하니, 매부의 말이 옳았던 듯싶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방 이 당장에서, 더구나 수하의 군졸들을 내버리고 혼자서 몸을 빼쳐 이 자리를 물러 내버린다는 것은 남아의 기개로나 남의 웃 사람 된 체면과 의리로나 감히 할 짓이 못되었다.
이 싸움이 당연히 해야 할 싸움이냐, 아니하여도 상관없는 싸움이냐, 또는 싸워서 대체상 불가한 싸움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요. 명색이나마 군인으로 한번 싸움에 임하여 이미 무서운 싸움이 눈앞에 벌어져 있는 이 당장에서 말이었다.
항차 적군은 일본군.
연일 그동안 하는 행동거조가 도무지 방약무인이요 이치에 부당하였다.
남의 나라에 함부로 군사를 몰고 들어와, 왕궁에다 대포를 겨누어 ( ) 안안을 저희 땅처럼 수직하고 순찰하고 하여, 그러나 필경엔 범궐( 犯闕) 까지하려 들어, 이런 불측하고 괘씸스럴 도리가 없었다.
저희가 무엇이며 무슨 내력에 이 해건고 할 때에, 놈들을 한놈 아니 남기고 모조리 다 쳐죽이고 싶은 분심이 무럭무럭 치닫는 것이 있었다.
한 삼십 분, 맹렬한 맞총질이 계속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러자 별안간 남쪽 광화문 편으로부터 몇 방의 총소리가 울려오더니, 이내 곧 일병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돌격의 함성이 요란히 일었다.
마치 그와 호응하듯이 이편의 적도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면서 궁장 밑까지 돌격을 하여 와 궁장 위로 우뚝우뚝 적병의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 다.
얼른 보아도 한 오십 명은 넉넉하여 보였다. 그 수효만으로도 삼십 명 이 못 되는 이편을 누르기에 부족할 것이 없는데, 나아오는 돌격부대를 엄호 하느라, 그들의 등 뒤로부터 한결 맹렬한 총질을 하는 것을 미루어, 그 뒤에도 불소한 병력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광화문 편의 함성으로 잘못하다 앞뒤고 무찌름을 받나보다 하여 동요의 빛이 보이던 이곳 군졸들은 아니나다를까, 전면의 적이 마주 돌격을 하여 와, 그런데 그 수효가 수효로도 이편을 덮어누를 병력이어…… 이편은 그만 압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상 여기서 저항을 계속한다는 것은 결국 전멸을 의미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적병은 궁장 위로부터 풀쩍풀쩍 뛰어내리고,
이편에서는 한 방 두 방 총질을 하는 양하더니, 하나가 문득 진지를 버리고 도망질을 치자, 우우하고 그를 본떠 일제히 도망을 친다.
우선 모양이 창피하고, 또 퇴각을 하더라도 병정답게 질서있이 퇴각을 하였으면 손해가 적을 것이라, 선용은 힐타를 하였으나 한놈 뒤도 돌아보는 놈이 없었다.
단 혼자 남은 선용은 저도 도망을 치기 아니면 군도를 뽑아들고 적병에게로 짓쳐들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한 몇 놈 쳐죽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오십 명이고 백 명이고 있는 대로다 죽이는 재주는 없었다. 결국 몇놈 죽이다 적의 뭇 창 끝에 횟감이 되어 엎 드러지는 것이 있을 따름이었다.
결기는 있어, 놈들 앞에 꽁무니를 두르고 도망을 치기는 창피하고, 그렇다고 덤벼들자니 하나마나한 짓이고. 해서 방금 죽음이 박두한 사선( 死線) 인것도 순간 잊어버리고서 멍하니 군졸들의 도망질치는 꼴만 바라다보고 섰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무엇이 엉덩판을 직신한다.
그러자 또 앞으로도 총끝에 꽂힌 창끝이 번쩍하고 앙가슴을 바싹 겨눈다.
적이 만일 무심히 보았다면, 창 끝으로 엉덩판을 직신하는 대신, 정통으로 등짝을 칵 찔렀을 것이었었다. 그러나 달려들어서 문득 보니, 수하 군졸놈들은 뿔뿔이 죄다 도망을 빼고 없는데, 저 혼자만 남아서 하도 기가 막힌지 우두커니 그 자리에 가 서서 도망하는 부하놈들만 바라다보고 섰는 모양이 측은도 하고 희한스럽기도 하여 보였던 모양이었다.
일병은 뒤엣놈까지 앞으로 나서더니 두 놈이 선용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도망질 치는 군졸을 바라다보고 하다가, 저희끼리 마주 웃으면서 무어라고 지껄이었다.
선용은 물론 알아듣지도 못하나,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그러는지는 알 수가 있었다.
잠깐 동안 그러다가 한놈이 선용의 손에서 총을 거두고, 한놈은 군도를 거두고, 그러고는 가라는 뜻으로 손짓을 하더니, 저희는 저희들 갈 데로 씽씽 가버리는 것이었었다.
이날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일본파 개화당이 일본공사 대조의 지휘를 받아가며 신정부를 조직하였다.
이 자리에, 개화당의 애초 계획대로 대원군도 맞아들였다.
대원군은 그러나, 민비가 그대로 내전을 차지하고 있고, 세상에 비위가 맞지 아니하는 개화당들을 데리고 일본의 지휘를 받아가며 이러고저러고 한다는 것이 도무지 내키지 않은 노릇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흔연하면서, 미구에 밖으로는 청국과 연락을 하고 안으로는 동학당을 충동시켜 일본 세력과 개화당을 몰아낼 계책을 궁리하였다.
천하를 얻은 개화당은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노라고 하였다. 이 새로운 정치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기관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것을 만들었다.
영의정으로 들어앉은 김홍집(金弘集)이 총재가 되고, 의원(議員)은 박정양, 민영달, 김윤식, 김종한, 조희연, 이윤용, 김가진, 안경수, 정경원, 박정양, 이원긍, 김학우, 권영진, 유길준, 김하영, 이응익, 서상집 이런 인물 들이었다.
군국기무처는 그로부터 한 반 년 동안 두어져 있었다.
그동안에 이백 가지나 되는 새로운 제도와 법령을 만들어 국민에게 반포를 하였다.
공사(公私)의 문서에, 명나라나 청국의 연호 연대를 쓰던 것을 폐하고, 조선 개국기원을 쓰라.
청국과의 조약을 고쳐 하고, 열국(列國)에 특명대사를 보낸다.
문벌과 반상의 계급을 없앤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쓴다.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가 되어야 혼인을 허락한다.
죄인은 당자를 처벌할 뿐이요, 가족에까지 연좌시키던 것을 폐한다.
과부의 재혼을 허락한다.
공사간 종문서(奴籍)를 없애고,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을 금한다.
재인과 백정을 평민으로 인정한다.
과거법을 폐하고, 새로이 관리의 등용법을 세우고.
그동안 국정을 어지럽게 한 간신의 무리를 처벌하고.
토지와 집을 세력가에게 빼앗긴 것으로 십 년이 넘지 아니한 것이면, 확실한 증거에 좇아 도로 찾아 준다.
정부의 제도를 고쳐, 의정부를 내각(內閣)으로, 영의정을 총리대신으로.
아문(衙門)을 부(部)로 고치고. 내무부, 외무부, 탁지부, 군부, 법부, 학부, 농상공부의 일곱 부를 두고.
지방을 13도, 7부, 1목, 331군으로 나눠, 도에는 관찰사, 부에는 부윤, 목에는 목사, 군에는 군수를 두고.
군제(軍制)를 고치고.
은전, 백동전, 적동전, 황동전의 네 가지 새 돈을 발행하기로 하고.
쌀과 미영 대신 돈으로만 세납을 바치게 할 것.
대강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중에는 결의만 하고 실시는 하지 아니한 것, 반포는 하였어도 백성들 이 실행 치 아니하는 것, 그래서 흐지부지한 것이 많았으나, 아뭏든 그 새까지는 보지 못하던 혁신은 혁신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의 사업 가운데 각 관아의 도장을 팔 것, 총리대신 이하 평민에 이르기까지 문패를 써붙일 것, 노상에서 만나 인사하는 법 따위 들이있는데, 이것이야 혁명정부의 혁신사업 치고는 자못 농판스런 수작이 아닐수 없었다.
경복궁에서 하마 목숨을 날릴 뻔하였다가, 또 일병의 포로가 될 뻔하였다가 모면이 된 선용은, 다시 병문으로 돌아갈 면목도 없고, 흥도 없고 하여, 사직 골 누이의 집으로 우선 찾아갔다.
매부 영석은 벙실벙실 웃으면서 저물게 돌아왔다.
영석은 선용이 무사한 것을 보고 반기면서
"그래, 어떻게 했나?" 하고 물었다.
선용이 주욱 겪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다 듣고 나서는
"하 마트면 큰일날 뻔했군. 그래 내가 애당초에 무어라던가. 인제는 다신 병정 그만두구 우리 개화당이나 들어서 일하두룩 하세나." 하였다.
선용은 퉁명스럽게
"나는 개화당 싫소."
"어째? 자네 조선이 개화하는 거 반댄가? 문명개화해서 일등국 되가지구 남처럼 잘 사는 거 반댄가?"
"개화는 불가불 해야겠읍니다. 고 왜놈들 뇌꼴스러, 우리두 어서어서 개화 해 가지구 보아란드끼 살아야 하긴 하겠읍디다. 형님 다니시는 미국 사람 병원두 그게 다 개화속 아뇨? 다 부럽습디다. 그렇지만…… "
"그렇지만 무어야?"
"남의 불에 게 잡아 무얼 허우?"
"남의 불에 게 잡다니?"
"자기네 힘이라곤 한푼에치두 없어가지구."
"힘?"
"힘이라께 다른 것이요? 나라 백성이 딸구, 일을 할 때면 백성이 뒤를 받쳐주구 하는 게 힘일 테죠."
"백성이야 농사하라는 백성이지, 그런 일에 참섭하라는 백성인감? 우리 가정부 차지하구 앉아서 좋은 개명한 정치 해주면, 백성들은 편안히 앉아 농사나 짓구 하는 거야."
"말씀 마시우. 갑신정변이라드냐 그때 일, 형님은 노상 분해 하십디 다마는 그때두 난 보기에 백성들이 들어서 개화당 뒷받침을 해주었다면 그런 낭패는 아니 보셨을 것 같습디다."
"꿩 잡는 게 매 아닌가. 아뭏든 이번엔 성사했으니깐, 앞으룬 염려 없네."
"아무 힘도 없이 가만히 앉았다 왜놈들이 와서…… 와서가 아니라, 개화당이 불러왔지요. 그래, 왜병이 원세개허구 민가를 때려 내쫓아 주니깐 얼씨구나 우우 나서가지구는 무얼 어쩌구어쩌구. 그게 애들 장난이지, 나라 일하는 거요?"
"허허허허, 이 사람 이거 큰일났군."
이 해 시월 열이튿날, 전봉준은 삼례(蔘禮)에서 다시 동학의 난을 일으키었다.
소식을 들은 선용은 즉시 행장을 차리고 누이와 매부 영석을 작별하였다.
지나간 봄에도 선용은 동학란이 있었을 때에 가자던 것을, 영석과 누이가 굳이 붙잡아서 작파를 하였었다.
이번에도 영석은 만류하였다.
동학당의 중요한 표방이, 안으로는 악신들이 있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니 그들을 내쫓아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한다는 것과, 외국 일본이 조선을 침노하여 우리의 강토가 위태하게 되었으니 그를 쳐 물리 친다는 것과 이 두 가지 것이다.
그러나 악신의 무리는 이미 개화당의 신정부가 되면서 다 쫓았고 처벌을 하였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다음, 일본은 절대로 우리를 도와 우리로 하여금 독립국이 되게 하여 동양의 평화를 길이 세우자는 데 있지, 결단코 청국과 같이 조선을 저희의 속국을 만들려는 야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아라, 지금 일본은 조선을 보존시켜 주기 위하여 국력을 기울여 가며 청국과 전쟁을 하지 아니하느냐.
그런 일본을 배척한다는 것은 천하에 경솔한 짓이다.
또 동학군쯤으로는 일본군과 싸움을 청한다는 것이, 돌에다 계란을 던짐과 다름없는 무모한 일이고.
선용은 그러나 영석이 만류함을 듣지 않고 마침내 떠나고라야 말았다.
7. 大 虐 殺[대학살]
공주는 남쪽으로 서울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북쪽과 서쪽과 남쪽이 금강(錦江)으로 에둘리고, 동쪽이 계룡산 연봉의 첩첩한 산악지대요 한 공주성은, 이른바 지키기 쉽고 치기 어려운 천연의 요새 랄 땅이었다.
관군은, 올라오는 동학군을 공주에서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다.
충청감사는 박제순(朴齊純), 이기동(李起東)이 중군이었다.
중군 이기동은 주력을 주봉(周峰)에 두고, 구성창(具成昌)으로 금학동 ( 金鶴洞)을, 구상조(具相祖)로 곰나루(熊津)를, 장용진(張容鎭)으로 봉화대( 烽火臺) 를 각각 지키게 하였다.
성하영(成夏泳)이 이천의 병력으로 이인(利仁)에서 전위를 섰고, 공 주의 목이라고 할 수 있는 우금치(牛金峙)는, 천 명 가량의 일본군이 지키었다.
문제는 이 일본군이었다.
서울로부터 뒤미처 내려온 이두황(李斗璜)은 일천의 병으로 우금치의 예비군이 되어 공주성 최후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관군의 총세는 일본군까지 합하여 팔천 명이었다.
동학군은 논산(論山)에다 본진을 두고 공주를 무찌를 태세를 차리었다. 이 논산의 본진을 짠 동학군은, 마산(馬山)의 김원식(金元植), 진안( 鎭安) 의조 진문( 趙鎭文), 건평(乾坪)의 이유상(李裕相), 논산(論山)의 윤지 병( 尹芝炳) 과 방학주(方學柱), 두계(豆溪)의 김홍제(金鴻濟), 영동(永同)의 최 사문 ( 崔士文), 이 밖에 십여 고을의 접주들이 각기 거느리고 온 부대였다.
동학군의 군세는 논산의 본진만 하여도 오만이라 하였다.
이 논산의 본진 외에, 김개남(金介男)은 동학군의 등 뒤를 경계하기 위 하여 전주를 지켰다. 또 용맹하기로 이름난 손화중은 관군의 한 부대가 서울로 좇아 목포에 상륙한다는 소문이 있어, 역시 등 뒤의 위협을 막기 위 하여 광주로 내려가 목을 지키었다.
이 밖에도 안승관(安承寬)은 수원에서, 고석주(高錫柱)는 홍천( 洪川)에서, 김 복용( 金福用) 은 목천(木川)에서, 최한규(崔漢圭)는 공주 근처에서, 정원준( 鄭元俊) 은 옥천에서, 최경선(崔慶善)은 예산(禮山)에서, 최난 선( 崔蘭善) 은 여산(礪山)에서, 고준봉(高峻峰)은 보령(保寧)에서 각기 분산적으로 난을 일으키어 가지고 있었다.
충청, 전라 두 도는 그리하여 거의 동학군으로 동원이 된 느낌이 없지가못하였다.
동학군은 논산의 본진만 하여도 병세가 오만이라 하였다.
오만이면 미상불 큰 병력이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부질없는 수효로 거추장스런 덩치였다.
오만의 동학군 가운데 삼만은 바로 며칠 전까지 타작마당에서 벼타작을 하던 순짜 농민과 동학당원들이었다.
그들의 병기라는 것은 창이나 죽창이 고작이요, 태반은 몽둥이, 쇠스랑, 도리깨, 식칼, 낫 등속의 되는 대로 얼른 집어들고 나온 농구 ——— 농사 연장 이었다.
전쟁은 결코 농사가 아니었다.
지나간 봄과 여름의 거사에서 동학군은 제법 변변한 관군을 만나 제법 접전 다운 접전을 하여보지도 않고 승리만 크게 하였었다.
이번의 서울 진격(進擊)에도 역시 관군은 그렇게 하잘것없고, 싸움은 그렇게 만만하고, 승리는 그렇게 크려니만 믿었다.
동학군이 얼씬만 하여도 관군은 성과 병기와 양식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것이라 하였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사지'이 주문만 외우면 관병이 쏘는 탄환은 몸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서울로 몰고 올라가 악신을 모조리 베고, 왜병을 소탕하고, 그러고 나면 게다가 양주목사를 하고, 남원부사를 하거니 하였다.
삼만의 농민과 동학당원들은, 그리하여 몽둥이를 들고 도리깨, 쇠스랑을 들 쳐 메고 모여든 것이었었다.
행군(行軍)하는 데, 용군(用軍)하는 데 주체스럽기만한 이 나그네들이, 진중에서 없애느니 식량이었다.
동학군의 간부들은 그들 역시 관군의 저항이 약할 것과 동학군의 승리를 맹신 하였다.
그들 역시 관군과의 싸움이란 먼젓번의 그러한 것이려니 믿고 더 생각 하려 아니하였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전장(戰場)으로 농사를 하러온, 선량하나 부득불 어리석은 무리들을 별로이 주체스러워 아니하고, 울레줄레 데리고 다니던 것이었었다.
오만 가운데 삼만은 그러하고, 나머지 이만 명이 어설프나따나 병정 흉내를 낼 줄 아는 병정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병기를 볼 양이면 한 심 스러웠다.
열 명 앞에 일곱 명 푼수밖에는 총이 없었다.
그렇게 모자라는 총이나마 대부분이 구식의 화승총(火繩銃)이요, 오 연 발의 신식 총은 열에 하나도 드물었다.
대포는 네 채를 끌고 다니나 탄환은 한 방도 없었다.
동학군과 관군을 놓고 이렇게 비교하여 볼 때에, 싸움은 승부가 미리서 작정이 되어가지고 있는 싸움이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선용은 시월 그믐에야 논산에 당도하였다. 장사꾼인 체하고 일부러 공주로 들어가 관군의 물정을 살피고 하느라고 보름 가까이 지체가 된 것이었었다.
선용이 논산으로 와 동학군에 들기는 말 한마디로 족하였다.
외숙 박재춘이 정녕 참예를 하였거니 하고 두루 찾았다.
군사가 된 이상, 자유로운 몸일 수가 없는지라 틈틈이 그 오만 명이나 들끓는 진중에서, 이 부대, 저 부대, 사람을 찾고 다니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공주 접전의 첫시작이 동지달 열이렛날이었는데, 열이튿날에야 겨우 그것도 우연히 만나게 되었었다. 전봉준이 몇 사람의 막원(幕員)을 데리고, 각 진지를 돌아보는 그 막원 가운데 외숙이 섞여 있었다.
모사(謀士)로 있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선용은 넌지시 뒤를 따라가다 지나가는 체하고 외숙의 옆구리를 찔벅하였다.
재춘은 선용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고 일변 반기면서
"너, 웬 일이냐? 하고 묻는다. 그러더니 좌우를 돌아보다,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와 재우 쳐 묻는다.
"응? 웬 일이냐?"
"저두 양주목사나 좀 얻어 할까 하구서 접전하러 왔죠."
선용이 웃으면서 대답하는 말에, 재춘도 빙그레 같이 웃고 나서
"어서 집으로 가거라."
"전 동학하면 못 쓰나요?"
"서울 가 있다드니, 무엇 하자구 옐 쫓어와?"
"저두 와서 보구, 후회가 나긴 합니다만 서두…… "
"무슨 후횐지는 모르겠다만, 후회가 난다니 실없이 다행이다. 오늘이라 두 집으로 가거라. 가는데…… 그래 서울서 오는 길이냐?"
"지난달 그믐날 논산 당도했어요."
"서울서는 언제 떠나서?"
"시월 열사흗날 떠났어요" "그럼 이번 변 보았겠구나?"
"보다니, 저두 소대장이라시구, 병정 한 소대 가지구 경복궁 수비하다 왜병이 범궐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목숨 날릴 뻔했드랍니다."
"흐응?"
재춘은 신기하고 다시 보인다는 듯이, 선용을 위아래로 씻어보다 가
"왜 병이 서울을 점령하구 범궐을 했다드니 허전이 아니로구나? 그러구, 개화당이 조정을 차지했다면서?
"네."
"왜병의 총칼 바람에?"
"그렇죠."
"죽일놈들. 그럼, 민가패는?"
"죽구, 쫓겨나구 했죠. 그렇지만 내일 모레 또 어떻게 될지 알아요?"
"?……"
"개화당이 무슨 투철한 힘이 있어서 득세를 한 것이 아니라, 왜군의 병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깐, 내일이라두 청국한테든 아라사(我羅斯 : 露西亞[ 로서아]) 한 테든 왜병이 쫓겨나면 개화당은 절루 쫓겨날 것이 아니겠어요?"
"………"
재춘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면서 감탄 하여
거 사람의 새끼는 서울루 보내란다드니, 서울이 좋기는 좋은가 보구나.많이 방납했다. 의사가 많이 트였다. 네 말이 꼭 옳은 말이다.
재춘은 그러고 나서 잠깐 무엇을 생각 하다가 서울서 내려오면서, 관군 더러 만났느냐?
내려오면서는 보지 못했어두, 공주서 한 보름 있다 왔지요.
허어……그래, 어떻드냐?
병력은 한 칠팔천 되는 모양인데, 왜병이 한 천 명 와 있다지요.
왜병이?
네.
천 명?
그렇다나 봐요.
쯧, 아무때 싸워두 왜병과 한번 싸움은 하자는 노릇이니깐…… 그래, 관군의 방비는?
대단해요.
사기(士氣)는?
왕성한 편입니다.
병기(兵器)는?
동학군에다 비길 게 아녜요, 병정마다 죄다 한번 재이면 다섯 방씩 쏘는오 연발 신식총이구요. 대포두 여러 가지 것으루…… 쯧, 총이 아무리 좋기로소니, 제깐놈들 하잘것 있느냐?
선용은 물끄러미 외숙을 바라다보고 나서 아저씨?
오냐.
접전을 그럼 총으로 하지, 쇠시랑이나 도리깨루 하는 법인가요?
해서, 싸움만 이겼으면 그만 아니냐?
이겨지나요?
지난번에 고부 황토현서 시작해 가지구 전주를 함락시키기까지, 우리 동학군이 무얼 가지구 접전을 해서 번번이 그렇게 이긴 줄 아느냐?
그때야 싸웠나요? 싸움도 하기 전에 관군이 지레 놀라서 달아나구 달아나구 했지요.
이번은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있드냐?
그때허군 다릅니다. 공주를 지키는 관군은 평양병정 강화병정허구 같이 치는 공주병정입니다. 거기다 왜병이 천 명이나 있지요. 왜병 하나가 조선 병정 열두 더 당합니다. 동학군은 아마 천명은 당해내리다. 왜병은 뽑아서 꼭 이태씩을 훈련을 시키구 시키구 해둔답니다. 저두 이번에 경복궁 범궐때 잠깐이지만 다들려두 보구 했지만, 놈들이 여간 규율이 있구, 여간 맹랑한 게 아녜요. 게다가 병기는 방아쇠 한번에 수백 발씩 나가는 속 사포( 速射 砲) 를 가졌지요…… 아 저 성환서, 평양서 그 숱한 청국병정을 들이 개 잡듯 해가면서, 시방 청국으로 칫쳐 들어간다는 소문 못 들으셨나요?
아니, 평양서 왜병이 청병한테 함몰을 당했다면서?
누가 그러죠?
서울서 그런 소식이 왔어.
대원군이 송인옥(宋仁玉)을 밀사로 전봉준에게 보내어 시방 왜병이 서울을 점령하고, 왕궁을 침노하여 왕을 총칼로 협박하여 가며 개화당패로 하여금 개화와 문명을 빙자코 국정을 어지럽히니, 일본과 개화당으로 연하여 사직이 위태하게 되었은즉, 속히 거의(擧義)를 하라고 충동을 시킨 일이 있었다.
그 편에 짐짓, 일군이 평양에서 패전을 한 것으로 속여 전하였던 것 인지도 몰랐다.
평양서 일군이 패했다는 건 잘못 아셨읍니다. 그리고…… 그거야 왜병이 패했건, 청병이 패했건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어째 상관이 없읍니까? 일본군사 만 명만 가지면, 이까짓것 조선은 한 달지 간에 다 평정하구 맙니다. 그런데, 이 형편 없는 오합지졸 동학군을 군사라 시구 몰구 나와 일본과 전쟁을 하자구 들어요?
너, 고 말이 과하지 않으냐? 오합지졸이라니?
재춘은 기색이 변하니 가지고 나무란다. 선용은 그러나 상관 없고 오합지졸이 아니구 무엇입니까? 농사일하다 말구서 도리깨, 쇠시랑 둘 쳐 미고 쫓어온 농군들이 오합지졸이 아니구 무엇입니까?
허, 거 참?
저두 동학당이 제일 일은 함직하다구 생각했어요. 개화당이니, 민가 네 사대당이니, 아라사파니, 미국파니 다아 소용 없구, 동학당 하나가 일을 하겠다구. 백성이 등 뒤에서 뒷받침을 해주니깐요. 백성이 등 뒤에서 뒷받침을 해주는 게 그게 힘 아녜요? 그래서 저두 서울서 그런 생각 저런 생각 없이 무턱대구 쫓아내려오질 아니했어요. 했드니, 막상 와서 보니깐, 호왈 십만 해놓구는 실속은 병정다운 병정 천백 명 몫두 못하게 생겨놨으니 이 거 큰일 아녜요?
모르면 몰라두, 이 병력 가지면, 서울을 뺏기는 염려 없으리라.
서울만 뺏으면 일은 다 되나요?
다 되지 않구 어떻게요?
서울을 뺏으면 동학이 천하를 얻은 것이니, 일 다 된 것이 아니겠느냐.
네 말대루 동학은 백성이 뒷받침을 해주니깐, 서울을 뺏구서 정부를 차리구 앉어 호령을 하면 백성들은 절루 따를 게 아니겠느냐. 그렇게 해서 천하를 얻구, 영(令)이 서구 한 다음에는, 십만이구 백만이구 조선군사 갖추어 가지구 일본과두 전쟁을 하는 것이구.
가사, 아저씨 말씀대루 낼 모레 서울을 뺏구, 동학당 정부를 차리구 하게 된다구 합시다. 그럭헌다면, 아마 글피쯤은 일본군사가 몇만 명 들어 닥칠 텐데, 어느 해가에 그 십만 명 백만 명 조선군사 갖추어 가지구, 일병 막나요? 지끔 이 무리 가지구는 어림두 없는 일이니깐 말씀에요……… 잘못 하셨어요 들. 수도자(首導者) 되시는 양반들이 잘못 생각들을 하셨어요. 저는 그새 며칠 두구 고옴곰 생각했는데, 한가지 좋은 수가 있었는데 들 그리셨어요……… 이렇게 쓰잘데없는 무리들을 한꺼번에 별안간 모아가지구 서울을 치네, 일본과 전쟁을 하네 조급히 서두르실 것이 아니라, 네? 아저씨, 이 럭 허거든요, 부안포(扶安包) 하면 부안포가, 순창포 하면 순창포가 제각기 제 고을에서 제 고을만 점령을 하구 있어요. 그러다 관군이 몇백 명 이구 오면, 형세 보아 싸우든지 잠시 흩어졌다, 관군이 물러간 뒤에 다시 또 모여서 고을을 차지하구…… 연방 두구 한 삼 년 그럭허면서 양병을 하거든요. 한 고을이 일 년에 천 명씩 양병을 하면, 삼 년이면 삼천명 아녜요? 오십 고을만 하여도 십오만 명, 백 고을이라면 삼십만 명 아녜요? 잘 양병한 삼십만 명 있으면 그땐 일본과 전쟁두 할 수가 있을테죠. 무어 서울쯤 치기는 누워 떡 먹기구요.
쯧, 네 소견두 근리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저씨?
오냐.
저허구 같이, 오늘 저녁에 떠나시죠?
나는 못 간다. 네나 떠나거라.
진정 못 떠나시겠어요.
사람이라껀 의리가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냐.
알겠읍니다. 그럼 저나 떠나죠.
오냐. 부디 상심해 가거라.
외가댁에 기별하실 말씀 없어요?
가 할머니나 뵙구, 나는 만났다는 말씀 사뢰지 마라.
작별하고 돌아서다, 재춘이 다시 부르더니 너 아무더러두 이 진중에서 지금 나한테 하던 이야기 아니했겠다?
아저씨께 첨이어요.
아무더러두 이야기하지 말구 떠나야 한다?
염려 마세요. 그리구 부디 몸조심하세요.
동학군은 십칠일날, 드디어 전군에서 뽑고 뽑은 오천군으로 전위를 삼고, 주력이 그 뒤를 싸면서 이인으로 진격을 하였다.
이인은 공주성의 목 우금치(牛金峙)의 전초선(前哨線)으로, 조영하의 관군 이천이 지키고 있었다.
오천의 전위가 나오고, 비록 도리깨와 쇠스랑은 메었을망정, 사만이 넘는 주력이 그 뒤를 싸면서, 글자 그대로 만산편야하여 쳐들어오는 광경은 미상불 담소한 군사로 하여금 겁이 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반일의 격전 끝에 큰 손해와 함께 이인의 조영하군은 아뭏든 물리쳤다. 그리고 다음날인 십팔일에는 단숨에 우금치를 무찌를 기세로 맹렬히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의 일병과의 접전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었다.
진지에 엎드려 빗발치듯 탄환을 퍼붓던 일병이, 느닷없이 총소리가 뚝 그치더니, 그 순간 왁 하면서 메뚜기 떼처럼 새까맣게 진지로부터 뛰 쳐나와 일변 쏘면서 일변 달리면서, 쏜살같이 달려드는 그 날쌤이라니, 그 사나 움이라니.
동학군은 전위부대가 무너지자, 뒤를 싸던 주력은 미처 손을 놀릴 사이도 없이 일병에게 한 중동을 꿰어 뚫리고 말았다.
이번은 만산편야의 진격이 아니라 만산편야의 패주였다.
그 달아나는 뒤를 일군이 쫓고,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관군이 쫓고 하면서, 한정없이 사살을 하였다.
쇠스랑을 메고, 도리깨를 쥔 농군의 시체로 산을 덮고, 피가 흘러 골물을 이루고 할 지경이었다.
이 우금치의 잠깐 싸움에 동학군은 만 명 가까이 죽고 상하고 하였다고 전 하였다.
우금치의 한 싸움을 고패로, 동학군은 연방 패하고 물러나다 마지막 이십삼일의 황화대(黃華臺) 싸움에서 완전히 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뒤로는 관군은 손을 나누어 각처의 동학 잔군을 분산적으로 소탕 하였다. 특히 이두황은 남쪽으로 내려가 나주, 광주, 순천 등지에서 숱한 동학군과 동학당과 아울러 백성들을 죽여젖혔다. 이 공로와 그리고 을미년( 乙未 年)에 일병과 함께, 이름이라도 국모(國母) 민비를 죽이는데 한 칼의 협력을 한 공로까지 하여, 후일 전라북도 관찰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동학란이 평정이 되자, 삼남 일판에서는 골골마다 동학의 잔당을 잡아 죽이는 소동이 일었다.
선용은 집으로 돌아가 삼 년 만에 모친 모시고 아내와 함께 설을 쇠었다.
모친과 아내는 삼 년이나 돌아다니다가 들어왔으니, 인제는 마음이 갈앉았거니 하고 속으로들 기뻐하였다.
선용은 그러나 마음이 조금도 갈앉은 것이 없었다.
삼 년이나 객지 바람을 쏘이고 다니다 돌아와 집에 있자 하니 갑갑하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들어앉아서 살기에는 너무도 마음이 커진 사람이었다. 그런 데다, 그동안은 오히려 잊고 지낼 적이 많던 옥봉의 생각이 새삼스럽게 도로 번뇌를 자아내고.
꼽아보면, 올해 갓 스물…… 인제는 필 대로 다 피고, 완구히 각시 꼴이 잡혔으려니 하면, 성숙한 옥랑 의 자태가 눈에 서언히 밟히면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곧 미칠 것만 같았다.
보름까지나 집에서 쇠고, 다시 또 나서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로 보름날이었다.
외가로부터 급한 기별이 왔다. 세째외숙이 붙잡히었다고.
선용은 황망히 외가로 달려갔다.
재춘은 섣달 그믐 임박하여 집으로 돌아와 은신을 하고 있었다. 동헌에서는 집안에서 뇌물을 두루 많이 써서 알고도 모른 체하여 주었었다.
그러나, 감영으로부터 참령(參領 : 少佐[소좌]) 하나가 병정 오십 명을 거 느리고 내려와 읍 촌으로 돌아다니면서 동학당을 붙잡아내었다.
재춘은 처음에는 무사히 넘겼다가 누가 뒤로 찔렀던지, 촌으로 나갔던 병정들이 석양때 돌아오면서 우우 달려드는 바람에 무심코 있다 그만 붙잡히었다.
재춘이 접주(接主 : 郡代表[군대표])인 것이 드러나자, 수하의 동 학당원을 다 불라고 무서운 형벌을 하였다.
묶은 두 정강이 사이에다 육모방망이를 넣고 주리를 틀었다.
살이 아스러지고, 허연 뼈가 비어져 나왔다.
재춘은 그러나 이를 뽀도독뽀도독 갈면서 단 한 명도 불지 아니하였다.
홀태가락에 불을 달궈 가지고 너벅다리에다 단근질을 하였다. 살이 타 들어가고 지글지글 끓어도 역시 이를 갈면서 불지 아니하였다.
아픔이 극도에 이르면 죄수는 까물치고 하였다.
까물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형벌을 늦추고는 얼굴에 찬물을 뿜어 깨어난다치면 결박짓고, 목과 발목에 칼 씌워 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또 끌어내단 형벌을 하고…… 나흘째 그러던 참이었었다.
선용은 큰외숙들에게 자초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옥은 누가 지키느냐고 물었다.
옥사정 외에 병정이 둘씩 밤마다 와서 지키는데, 돈 몇냥씩 가지고 가면 미음도 들려보내고 가까이 가 이야기도 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선용은 큰외숙과 함께 옥으로 갔다.
두 병정은 열 냥씩, 옥사정은 닷 냥을 각기 받고는 멀찍이 비켜나면서 모른 체하여 준다.
전후 좌우 사면이 다 진흙을 이겨 돌로 쌓아올린 두터운 돌각담이요, 위는 여는 지붕이요, 앞 한가운데로 육중한 옥문이 있을 뿐 가다 오다 창살 하나도 내지 않았고, 이것이 옥이었다.
지극히 간단하였으나, 죄수는 다 칼을 씌우고 중죄수는 결박까지 짓고 하여 가두기 때문에, 비록 돌각담 한 겹의 옥이라도 안으로부터의 파옥 같은것은 하기가 어려웠다.
옥 안은 밤낮 여부없이 깜깜 어둡고 바닥은 그대로 흙바닥.
죄수들은 맨흙바닥 위에 가족이 들여주는 짚이나 거적을 펴고 앉아, 혹은 누워 신음한다.
궂은비가 오고 이슥한 밤, 고달픈 죄수가 잠을 이루지 못하여 이뭉자뭉하고 누웠노라면 옥 구석으로 좇아 흐느껴 우는 귀곡성이 들리고 한다고 한다. 옥사(獄死)한 원귀의 울음일 것이다.
옥 구석에는 백골이 굴러져 있는 수도 있다. 친척 외로운 죄수가 옥사를 한 것을, 옥사정이 미처 치우지 아니하면 시체는 그대로 썩어 마침내 백골이 옥 구석으로 굴러다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으나, 옥은 구중중하고 무섬기가 서늑하였다.
선용은 옥문 앞으로 바싹 가 아저씨? 아저씨?
하고 나직이 불렀다.
반응이 없고 죽은 듯 괴괴한 가운데 문득 자지러진 신음 소리가, 그 가늘고 긴 여운이 바로 귀곡성인 듯 처량히 들리다 스러진다.
아저씨? 선용이예요.
선용이 조금 더 음성을 높여 부르는 소리에 응 하여 오오, 왔느냐.
하는 외숙의 약하기는 하나 또렷한 대답이 들렸다.
괴로우시드래두, 조금만 일러루 가차이 다가오세서 제 말씀 들으세요.
………
목과 발목에 칼을 쓰고, 두 팔을 뒤로 결박을 지웠고 한 몸이라, 움직이기에 무한 힘이 드는 모양, 한참 후에야 옥문 바투에서나 두 너를 좀 만났으면 하고 기대리던 참은 참이다.
아저씨?
오냐.
꼬옥 제가 하자는 대로 하세요, 네?
말해 보렴.
내일, 첫닭 우는 소리가 들리구 나서, 제가 이 문을 열 테니깐 마침 문 밑에 와 기시다 아모 말씀두 마시구, 제 등에 업히세요, 네?
………
네? 아저씨?
선용아?
네?
네 뜻이 매우 가상하다. 그렇지만 나는 죽어야 할 사람이니 파의해라.
사시구 보실 일이지, 어째 돌아가신다구 하세요?
나는 공주 접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 죽지를 못했어. 그 숱한 동 덕( 同德 : 同志[동지])들을 억울히 죽게 하고서 나만, 우리만 산대서야 무슨 의리며 무슨 면목이겠느냐. 다만 녹두 수령(首領 全琫準[전봉준])을 무사히 피신 시켜 드리느라고, 아깝지 아니한 목숨을 부지해 다녔던 것인데, 더구나 며칠 전 소식에, 녹두 수령이 붙잡혔다구 하니, 그 으런두 인제는 돌아가신으 런…… 그렇지만 아저씨. 할머니를 생각하세야 아니하세요? 팔십 당년의 할머니가 지끔 하마 돌아가시게 됐답니다.
그것두 네가 모르는 소리. 내가 만일 파옥을 하고 달아나 보아라. 누( 累) 가 당장 그 으런과 너의 큰외숙 으런들한테 미쳐 하루라도 더 사실 노인을 지레 돌아가시게 하고, 집안은 퐁당 망하게 되고 할 테니.
이런 때는 제발 그 고집 좀 쓰시지 마세요.
고집이 아니다.
그럼, 할머니허구 큰외숙들이랑 집안 다아 서울루든 어디루든 우선 먼 점 피해 가시게 하구서, 모레구 글피구 오께시니 그럭허시겠어요?
집안일은 둘째다. 나는 죽어야 할 사람야.
………
선용아?
네.
내가 너를 기대린 것은 다름 아니다.너의 큰외숙으런들한테 부탁을 했어두 했겠지만, 그 으런들이 그걸 가지구 혹시 나를 모면시킬 주선이나 하실까 봐서 네게 짐짓 부탁이니, 너 이 길루 가 내가 거처하는 사랑 아랫목에서 보면 반자가 조금 찢어진 것을 바른 자리가 있느니라. 거길 찢구 손을 넣으면 백지로 맨 책 한 권이 나온다. 그게 우리 포의 열 명록( 列名錄) 이니, 바로 곧 불에 사뤄버려라. 네게 부탁은 그것 한가지다.
다음다음날…… 을미年[년](乙未年) 정월 열이렛날.
박재춘과 함께 세 사람의 동학당원이 옥으로부터 사정(射停)으로 끌려 나왔다.
사정 앞은 벌판. 벌판을 건너 과녁이 섰다.
죄수 넷을 결박짓고, 다리 묶고, 눈 가리고 하여 과녁 앞으로 주욱 늘어 앉혔다.
병정이 양편으로 열 명씩 멀찍이 비껴 서서 경계를 한다.
사정 마당에는 병정이 이십 명, 일렬 횡대로 늘어섰다.
원이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나와 사정 마루에 앉았다.
동네 사람이 남녀 노소 수백명 뭉쳐나와, 사정 마당 좌우로 모여서서 수군덕거린다. 죄수의 가족들이 그 속에 끼여 있고, 더러는 소리를 삼키며 운다.
이윽고 참령의 구령으로, 사정 마당의 이십여 명 병정의 총부리가 일제 히 과녁 앞의 네 명 죄수에게로 향한다.
이것은 완전히 월권(越權)이요 불법이었다.
군대는 반란을 일으킨 혐의자를 수색하고 체포하고 하는 권리는 있어도, 그들을 처형까지 하라는 권리는 주어진 것이 없었다.
그러는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혐의자를 체포하여 임의로 총살을 하였다.
그러한 살육을 얼마나 하였는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참령이었다.
그 참령의 군도를 저 으 며 쏘앗!
하는 구령과 동시에 스무 방의 총소리가 한꺼 번에 꿍 ——— 울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는 여자의 자지러진 비명, 그 다음 요란한 통 곡.
선용도 사람들 틈에 섞이어 푸르르 주먹을 떨 뿐 어떻게 하는 수가 없었다.
이 고을은 접주 박재춘이 그 무서운 형벌 다 당하면서 끝까지 불지를 아니하였기 때문에 겨우 먼저 붙잡힌 세 사람과 박재춘과 네 사람이 죽었을 뿐이었었다. 다른 고을에서는 이삼십 명, 오륙십 명, 더 심한 곳은 몇백 명씩이 죽고 하였다.
그 이삼십 명, 오륙십 명 또는 몇백 명이 죄다가 동학란에 참예하였던 사람이냐 하면, 아니었다. 태반은 애먼 죽음이었다. 난에는 가담치 않았고, 단순히 동학당원이라는 것만으로 붙잡혀 학살을 당하고 하였다.
또, 동학란은 고사요, 동학당원도 아닌 멀쩡한 농민이 혐의를 입어, 혹은 악인이 무고(誣告)로 붙잡혀 원통히 죽기도 약간 한둘이 아니었었다.
선용은 매부 영석이 옆에 있었으면 하였다.
개화를 도창하며 혁신정치를 베풀어 나라의 강성을 꾀하고, 백성의 편안을 도모하고, 법을 쓰되 어둠이 없고, 죄를 다스리되 공변되고, 두루 이러하기를 언약한 개화당이 아니더냐.
조정의 간신과 악신을 물리치고, 나라를 도우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져 편안히 한다는 동학군의 도창과 다를 것이 없지 않으냐.
그런 동학군을 개화당이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정치하에서 함부로 붙잡아 죽이고 있다니.
내란을 일으킨 죄라고?
그렇다면 두목자들을 벌하는 데 그칠 것이지 동학당원이란 동학당원은 이 잡듯 잡아내어 몰살을 시키려 들음은 무엇이냐. 변변히 심판도 함이 없이…… 항차,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을 짐승 잡아 죽이듯 죽이다니.
이렇게 선용은 매부 영석을 대하여 실컷 공박을 하여 주고 싶었다. 그런 깐으로는 당장 두주먹을 부르쥐고 서울로 쫓아올라갈 생각이 치밀기도 하였다.
선용은 재춘의 치상을 치른 후, 불덩이를 삼킨 것 같은 울분한 가슴을 안고 모친이나 하직을 하고서 도로 다시 나서려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중로에서 생각하니 맏동서 송서방의 동정이 마음에 걸려 두뭇개에 들러 보았다.
역시 동학에 가담을 하였었고, 처음 나가서는 무사히 돌아왔다, 둘쨋 번 공주 접전에 나가서는 한번 나간 채 이내 소식이 없어 죽은 것이라 하고, 시체도 찾지 못한 발상(發喪)을 하였다는 것이었었다.
서산나귀 타고 양주목사 도임 가자던 사람이, 공주성 아래서 주인 없는 고혼이 되고 만 것이로구나 하였다.
선용은 노자 대신으로 인삼을 한 삽짝 사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서울은 인제는 내키지 않고, 조선 팔도를 한 바퀴 돌아보리라 하였다.
8. 通譯政治[ 통역 정치] 삼백 년을 당파싸움으로 갖은 비극, 갖은 추태 다 피우면서 살아온 조선 사람이, 일조에 개화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그 버릇 별안간 남 주었을 리 없는 것이었다.
갑신정변의 역신으로 몰려 일본 망명을 갔던 박영효(朴泳孝)가 개화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고국을 찾아, 십 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박영효는 돌아오자마자 한 장의 상소로 반역죄의 면사를 받았고, 다시 겅중 뛰어 내무대신이 되었다.
김옥균은 죽은 시체를 찢어 대역의 죄를 다스렸거든, 김옥균의 윗길 가는 박영효를 면사가 어디 당한 일이냐고, 상소를 한다 어쩐다 시끄런 하였으나, 천하가 개화당의 천하요 겸해서 박영효는 왕이 특별히 총애를 하던 인물이요 하니, 암만 누가 떠들었자 별 조화 없었다.
민비는 재치가 빨랐다.
박영효가 돌아와 면사를 받고, 겅중 뛰어 내무대신의 자리에 올라앉자, 민비는 얼른 그를 끌어당겨 내 사람을 만들었다.
일본 세력에 눌려 꼼지락을 못하고 있는 민비는 임시방편으로 개화당 사람을 하나 얻어 앞에 내세움으로써, 민비 자신이 받는 일본 세력의 바람막이( 防風林) 같은 것을 만들어두는 것이 좋았었다.
대원군을 들쳐 업고, 일본공사 정상(井上)의 손짓대로 오락가락하는 김홍집의 찰일본파와, 겉은 일본파요 속은 민비와 손을 잡은 박영효의 왕궁 파( 王宮派) 와, 그리고 노서아 공사 웨베르가 조종하는 이완용, 안경수, 이범진 들의 아라사파(親露派)와 이 세 파가 개화당이라는 도가지 안에서 서로겯고 틀고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멍이 간 도가지는 거운거운 깨어져 버리려고 하였다.
일본은 많은 인명을 상하고 국재를 허비하여 청국과 싸워 이기기는 하였으나, 노서아와 독일과 불란서 세 나라가 나서서 협박을 하여, 청국에서 빼앗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도로 청국에 돌려주고 나니, 창피가 막심이요, 차 라리 전쟁을 아니 했더니만도 못하였다.
동양에서 세계 열국세력의 성쇠가 가장 예민하게 반영이 되는 곳이 바로 조선 조정이었다.
일본이 그렇게 국제적으로 바보스럽고 문문한 것을 보자, 조선 조정은 살며시 일본파를 괄시하기 시작하였다. 김홍집이 물러나고, 대신 박정양( 朴定陽) 이 총리대신의 걸상에 들어앉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 세력이 물러가고 노서아 세력이 부쩍 불었다.
민비는 이번에는 친로파와 얼른 뒤로 손을 잡고, 오랜 소원이던 개화당의 세력을 조정으로부터 뿌리째 뽑아버릴 책략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박영효는 이래서는 개화당이 피흘리며 싸워온 사업이, 개혁이고 독립 이 고다 허사가 되는 것이라 하여 심복인 훈련대 연대장(訓鍊隊聯隊長) 우범선( 禹範善) 과 이규완(李圭完), 신응희(申應熙) 세 사람을 데리고, 또 한번 변을 일으키어 조정을 숙청시킬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 음모는 그러나 미리서 발설이 되어 박영효는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가고, 결과 개화당은 절로 몰락이 된 형편이었다.
이때로부터 이완용, 안경수, 이범진 들이 정부의 요직에 들어앉았다.
청국이 늙은 범이라면, 일본은 어린 삵괭이요, 노서아는 북방의 주린 곰 이었다.
이 세 마리의 맹수가 조선이라는 한 덩이의 고기를 사이에 놓고 으르렁 거리며 싸웠다. 조선을 얻는 자 극동의 패권을 쥐는 자요, 조선으로부터 쫓긴자 극동으로부터 발붙임을 잃고 마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갑오·을미의 일청전쟁에서 어린 삵괭이 일본은 늙은 범 청국을 때려뉘었다. 그런 결과 일본은 그동안의 청국을 대신하여 조선에다 세력을 잡았다.
개화당은 이 일본이 조선에다 세력을 박는 그 앞잡이였다.
사대당이 청국의 앞잡이인 것처럼,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국의 속국인 것을 주장하며 청국의 낡은 세력을 조선에서 지탱하며 하게 하는 청국의 앞잡인 것처럼, 또 친로파가 조선을 노서아에 팔리게 하는 노서아의 앞잡이요, 정동구락부가 미국의 앞잡이요 한 것처럼, 개화당은 주관이야 어떠했던 객관적으로는 장차 조선을 일본에다 파는 앞잡이 노릇을 하여 논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에다 청국 대신 세력을 잡았다. 또 요동반도를 빼앗아, 장차 만주를 넘겨다볼 발붙임까지 만들었다.
어린 삵괭이 일본이 그렇게 청국을 때려눕히고, 조선이라는 고깃덩이를 집어 삼켜 더우기 만주까지를 넘겨다볼 채비를 차리려 하니, 북방의 주린 곰 노서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노서아는 독일과 불란서를 추겨가지고, 일본이 청국에게서 빼앗은 요동반도를 도로 청국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청국 하나를 때려눕히기가 고작인 때의 일본으로는, 노서아의 독일과 불란서와 이 늡늡장병 같은 세 놈이 눈을 부라리면 서너 인석, 그 요동반도 도루 내놓지 못해? 괜히 발끈 들었다 놔 버릴테니."
하고 을러메는 데는 어떻게 하는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요동반도를 청국에다 도로 내주었고.
한편, 서울 와서 있는 노서아 공사 웨베르는 그 능란한 수단을 마음껏 부려 민비를 끼고 친로파를 조종하면서, 조정으로부터 일본 세력의 앞잡이 개화당을 싹싹 쓸어버리고.
일본은 게도 구럭도 놓친 형국이었다.
적어도 그래서, 조선에 있어서의 세력만이라도 도로 붙들어볼까 하여, 때마침 갈려온 일본공사 삼포(三浦)가 박영효의 잔당 우범선과 일본인 낭인( 浪人)을 시켜, 또 한번 변을 일으킨 것이 곧 을미사변(乙未事變)이었다.
을미년 시월(陽曆) 초이렛날 밤, 개화당의 장사와 일본 낭인으로 된 오십여 명 일당이 공덕리(孔德里)의 대원군 별장을 엄습하여, 수직하는 병정들을 때려 가둔 후, 여드렛날 첫새벽 세시에 대원군을 승교에 태워 가지고 문안으로 몰아 들어왔다.
대원군은 이때 공덕리의 별장에서, 조정에서 보낸 삼십 명 병정에게 감금 생활이나 진배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대원군을 개화당은 이번에 또다시 끌어내던 것이었었다.
대원군과 개화당 사이에는 대원군은 왕을 보익하여 궁중 사무만 전담을 하고, 정치에는 일체로 참 섭치 아니하되, 손자 이준용(李俊鎔)을 삼 년 동안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가……라는, 그래서 장차 그 이준용으로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묵계가 있었더라 고한 다.
미상불 그런 교환조건이 아니란다면 궁중 사무나 맡아보고, 정치에는 아무 실권이 없는 자리에 대원군쯤으로 나와 앉으려고 하였을 리가 없는 것 이었었다.
스무날 달이 중천에 솟은 달빛 아래, 장사패의 뽑아 든 오십 자루 칼의 옹위를 받으면서 대원군의 승교는 서대문에 이르렀다.
서대문에는 훈련대 제2연대장 우범선이 이두황과 함께 훈련대 백여 명을 거 느리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또 소좌 마옥원(少佐 馬屋原)이 거느린 일본군 수비대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훈련대와 일본군 수비대는 대원군의 승교를 호위하고 직참 광화문으로 달리었다.
날이 이미 휘엿이 밝았고 광화문은 활짝 열리었다.
광화문 문 앞에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직접 지휘하는 궁성 수비의 훈련대와 충돌이 일었다.
반 시간이 못하여, 홍계훈은 탄환을 맞고 넘어지고 수비병은 흩어졌다.
취향정(醉香亭) 근처에서도 왕궁 시위대(王宮侍衛隊)의 일대가 저항을 하였으나 이내 물리치었다.
민비는 곤녕합(坤寧閤)에서 붙들리어 개화당의 장사와 일본인 검객의 칼에 시( 弑) 한 바 되었다.
당초에 일본공사 삼포가 새로이 조선으로 부임을 하려면서, 망명 가있는 박영효더러, 조선에 나가서 일을 상의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박영효는 우범선을 천거하였다.
삼포는 부임하여 오던 날로 우범선을 불러 그의 의견을 물었다.
우범선은 첫날에 여우 같은 민비를 죽여 없애지 않고는 조선 조정은 바로잡아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포는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필경 동의를 하였고, 그래서 이번 변에 민비를 죽이겠다는 것은 미리서 정한 방침이었다. 민비의 얼굴을 익히 아는 구연수( 具然壽) 와 또 일본 계집아이 하나를 일행 중에 데리고 간 것도 그 때문 이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일본공사 삼포가 궁중에 들어와 왕을 시켜 김홍집을 다시 불러들여 찰일본파의 내각을 조직케 하였다.
궁내대신에 이재면, 총리대신에 김홍집, 내부대신에 유길준, 탁지부 대신에 어윤중, 외부대신에 김윤식, 군부대신에 조희연, 학부대신에 서광범, 법무대신에 장박, 농산공부대신에 정병하 이러하였다.
친로파 이완용, 안경수, 이범진 들은 쫓겨나고.
갑오년 전과도 달라, 일본은 국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때라 낭인들이 조선 사람과 함께 범궐을 하여 왕비를 시하고 하였다는 것으로 거북한 문제가 일게 되자, 일본 정부는 삼포 공사와 낭인들 사십여 명을 붙들어다 광도( 廣島) 감옥에 가두었다.
이름이나마 국모(國母)를 죽이기까지 하고서 들어앉은 김홍집내각은 하여 커나, 이것저것 개혁에 손을 대었다.
양력을 쓰기로 하고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개국 505년(高宗[고종] 33년 丙申[ 병신]) 1월 1일로 고치었다.
종두규칙을 반포하였다.
서울 안에 소학교 네 곳을 세웠다.
군제를 고쳐 중앙에는 친위대(親衛隊),지방에는 진위대(鎭衛隊)를 두었다.
연호(年號)를 쓰기로 하고, 건양(建陽)이라 하여 이듬해부터 시행 하도록 반포 하였다.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고 왕이 국민에게 모범을 보인다 하여 먼저 머리를 깎았다.
이 단발령이 말썽이었다.
지방의 유생들은 이 목을 벨지언정 이 상투는 베지 못하오 하고, 상소가 빗발 치듯 하였다.
국모를 시(弑)하였다는 것과 단발령으로 인하여 지방은 발끈 뒤집히고,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의 여러 곳과 경기, 충청, 경상 각도에서 의병이 일었다.
이리하여 김홍집내각은 국민의 미움과 배척의 과녁이 되고 말았다.
일본과 개화당 내각이 인심을 잃는 것은 노서아 공사 웨베르와 친로파의 바라고 기다리던 기회였었다.
을미사변에 쫓긴 친로파 이완용, 이범진, 안경수 들은 정동구락부의 친미파들과도 연락을 하여가며 노서아 공사 웨베르와 함께 일 꾸밀 의논을 하였다.
계획은 다 익었다.
건양 원년, 병신(丙申) 이월 열하룻날 첫새벽, 왕은 어린 동궁(東宮)을 보따리처럼 싸서 안고 내관의 여복으로 변복하고, 내인들이 타는 교자 속에 숨어 앉아, 영추문으로 좇아 경북궁 ——— 누차의 변을 치렀고, 마침내는 왕비가 참살을 당하였고, 하여 마굴처럼 무선 기가 돌고 싫증이난, 그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에 있는 노서아 공사관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아관파천은 물론 친로파들이 설도를 한 것이었지만, 왕도 십분 그에 동의를 하였던 노릇이었다.
아관파천에 앞서, 정부에서는 의병을 토벌시키느라고 친위대의 병정을 태반이나 지방으로 풀어 내려보냈었는데, 이것을 안 노서아 공사 웨베르는 서울이 너무 허수하여 못쓰겠다고, 이월 구일날 인천으로부터 노아서 수병 이백 명을 불러올려 공사관을 엄히 수비하였다.
잠을 자다 밤 사이에 왕 ——— 권력의 중심물을 잃어버린 김홍집의 개화당 내 각의 대신들의 새벽잠을 두드려 깨워 코앞에 들이대는 것은, 노서아 공 사관으로부터 나온 체포명령이었다.
변을 듣고, 궁내대신 이재면이 내부대신 유길준더러 그 말을 하자, 유길준은 왕을 잃어버린 것은 궁내대신 너의 태만이라면서 이재면 뺨을 철커덕, 당장 왕을 찾아놓지 아니하면 목을 벤다고 얼러대었다.
이재면은 궁궐과 궁문을 수직하는 책임은 내부대신 너에게 있지 아니하냐고, 그러니 왕을 잃어버린 죄는 너에게 있느니라고 대들었다.
이렇게 왕 없는 빈 궁 안에서 서로 찧고 까불고 하는 그 자리에 역신 일당을 체포하라는 벼락령이 떨어졌고, 변을 듣고 달려들어온 김홍집과 정병하가 먼저 순검에게 이끌리어 경무청으로 가, 경무청 문 밖에서 그 즉시로 처형을 당하였다.
군중이 하루 종일 두 시체를 찢고 짓밟고, 불태우고, 욕하고 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김홍집내각이 국민에게 얼마나 깊이 미움과 원망과 오해를 받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었다.
어윤중은 고향 보은(報恩)으로 달리다 겨우 용인 가로의 주막에서 촌 백성들에게 죽고.
유길준, 조희연, 장박, 경무사(警務使) 권영진 들은 순검 일대에게 이 끌리어 경복궁을 나와 마악 해태 앞에 당도하였을 무렵이었다.
이때 삼부군(三軍府)는 일본군이 병영으로 쓰고 있었는데, 유길준이 별안간 몸을 날려 일본 병영 문 앞에서 수직하는 일본 병정에게로 달려들 면서다 쓰께데 구래( 구 해줍 쇼) 하고 소리를 쳤다.
일본 병정은 유길준을 병영 문 안으로 부축하여 들어갔다.
유길준을 쫓던 조선 순검은 닭을 쫓다 지붕만 올려다보는 개 꼴이 되었다.
유길준은 일본 병정에게 다른 세 사람이 구원을 청하였다.
일본 병정이 우우 달려나와 조선 순검에게서 세 사람을 빼앗아 각기 피신을 시켜주었다.
왕이 친로파의 손으로 넘어가고 천하가 또 한번 바뀌자, 개화당 김홍집 내각이 반포한 여러 가지 혁신법령이 거의 다 철회가 되었다. 단발령 물론 철회 되었다.
친로·친미파의 내각이 조직은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김병시(金炳始)를 올려 앉히고, 이완용이 외부대신, 박정양이 내부대신, 이윤용이 군부 대신에 경무사를 겸하고, 탁지부대신에 윤용구, 법부대신에 조병식, 궁내대신에 이 재순 대강 이러하였다.
정부를 조직하였다고 하지만 왕을 남에게 빌려준 정부가 실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노서아 공사관은 이백 명의 그 험상궂게 생긴 노서아 수병이 철통같이 수직을 하였다.
왕은 그 안에 들어앉아 외부와의 연락이라는 것이 아주 끊겨버리다시피 하였다. 궁내대신 이재순과 이완용, 이윤용, 이범진 이 사오 인이 가끔 번 차례로 노서아 공사관으로 와서 왕을 만나보고 할 따름이었다. 외국 사신이 간혹 와서 접견을 하는 것이었고.
왕과 국민 사이는 그래서, 왕이 흡사히 서백리아로 유형이나 간 것처럼 까마득히 멀었다.
왕의 신병에는 김홍륙(金鴻陸)이라는 인물이 딸리어 있었다.
김홍륙은 서백리아로 이민(移民) 갔던 농군으로 재주라는 것은 노서아 말을 조금 아는 것뿐이요, 그 외에는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판무식꾼이었다.
김홍륙은 웨베르의 신임으로 통역 겸 왕과 조정의 대신들과의 연락을 경계 하는 밀탐 겸 왕의 신변에다 배치하여 둔 웨베르의 수족이었다.
웨베르는 정부에 대하여 무슨 법령을 실시시킬 것이 있다든지 또는 왕에게서 어떤 이권(利權)을 얻어낼 것이 있다든지 하면 김홍륙을 통역시켜 왕에게 주청을 한다.
김홍륙은 왕의 대답을 웨베르에게 전한다.
웨베르는 김홍륙의 통역으로 왕에게서 얻은 재가나 승낙을 그대로 곧 실시 하도록 조정의 대신을 불러 전달하되, 김홍륙의 통역으로써 한다.
대신은 듣고 나서네, 알겠읍니다.
하고 물러나왔다.
통역정치의 불행과 희극스럼을 조선 백성은 이때부터 벌써 몸으로 겪은 것이 있었다.
김홍륙은 한낱 통변에서 비서원경(秘書院卿)으로, 비서원경에서 군부 협판( 軍部協辦)으로 겅중겅중 뛰어올라갔다.
왕이 일 년을 노서아 공사관에 있었기망정이지 이 년만 있었더라면 김홍륙은 그 부력(富力)이 전라도 하나쯤은 사자고도 하였을 것이요, 김홍륙 내 각도 한바탕 조직을 하였을는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왕이 노서아 공사관에 있는 일 년 동안에 조선의 중요한 이권은 노서아 사람을 비롯하여 불란서, 미국 사람들의 손으로 연방 들어갔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삼림 벌채권이 노서아 사람의 손으로 들어가고, 방적 공장의 설치권이 노서아 사람의 손으로 들어갔다. 노서아 정부와의 사이에 군용기지의 조차와 철도, 전신의 건설 및 전용에 관한 조약이 맺어졌다.
불란서는 경의선철도(京義線鐵道)의 부설권을 얻고, 운산 금산( 雲山金山) 의 채굴권을 비롯하여 전기, 수도, 철도의 부설권이 미국 사람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아관파천을 한 고패로, 열국의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은 그동안까지의 단순한 정치적·군사적이던 것으로부터 한걸음 나아가 경제적 침략으로 발전이 되었다.
경제적 침략…… 이것은 그동안까지의 정부(政府) ——— 왕조(王朝)의 멸망으로부터 나아가 민족국가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었다.
9. 末世[말세]에 橫行[횡행]하는 것 을미년 정월에 인삼 한 삽짝을 노자삼아 짊어지고 집을 나간 선용은, 그로부터 호남 일판을 골골이 더듬어 내려가 영남으로 건너가서, 영남을 역시 골골 이 더듬어 올라가 강원도로…… 강원도에서 함경도로…… 함경도서 평안도로 건너가 남쪽으로 내려와 황해도로…… 황해도에서 경기도로…… 이렇게 충청도 하나를 남기고 조선 전도를 골골이 들르면서 포구도 찾고 절도 유심 히 구경하면서, 사 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나, 무술년(戊戌年) 가을의 하룻밤, 무학재 고개로 좇아 푸뜩 서울 장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서울서는 우선 누이 내외나 찾아보고, 볼일도 약간 보고 이내 곧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 모처럼 노모 앞에 문안이나 드린 후, 또다시 집을 나와 그동안 마음에 계획을 정한 것대로 산으로 들어가고 이럴 예정이었었다.
서울은 그러자, 생각지 아니한 재미스런 일이 있었다.
왕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하여 한 새로운 국민운동이 일어났다. 독립 협회( 獨立協會) 가 바로 그것이었다.
임오군란으로부터 시작하여 청국과 일본과 노서아는 서로가 제마다 조선을 저 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겯고 틀고 하고, 안으로는 이들 외국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는 정당들이 바깥과 호응을 하면서 서로가 또한 치고 받고 하고하는 사품에 국민은 그동안 벌써 피비린내나는 변을 몇번을 치렀는지 모른다.
정치는 국력을 높이는 데 힘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내정은 썩을 대로 썩었고.
끊이지 않는 내란으로 농촌은 황폐할 대로 황폐하였고.
그리하여 국가의 기초가 되는 민생은 도탄이 이미 바닥에 닿은 느낌이었었다.
근본적인 혁신이 없기 전에는 명일은 멸망이 있을 따름이었다.
가뜩이나 거기에다 아관파천이었다.
왕은 왕궁을 버리고, 일개 외국의 공사관으로 가 그러나마 감금이 되어 있는 바나 다름없는 형편이었다.
최고 주권자 왕을 외국 사절에게 빼앗긴 것은 국가의 주권을 빼앗겼음 과일 반 이었다.
장차에 국력의 근원이 될 산업자원은 중요한 이권이 차례로 차례로 외국인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치적·군사적 간섭으로부터 경제적 침략에로의 발전이었다.
신지식을 배우고, 국제정세와 국내사정에 눈을 뜬 진보적인 청년들 사이에, 쇠망의 한길을 밟고 있는 민족국가를 근심하여, 어떤 외치는 소리가 있기를 기다리는 기운이 뿌듯이 일고 있었다.
갑신정변 때에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 건양 원년(丙申年[병신년]) 정부의 외부 고문( 外部顧問)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온 서재필, 미국 유학생 윤치호, 그리고 청년지사 이상재(李商在),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조직 하여가지고 민권사상(民權思想)과 독립정신과 혁신사상으로써 국민에게 부르짖자, 이를 기다리던 신진 청년들은 일시에 물결 쏠리듯이 독립협회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서대문 밖에 있는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은 중국으로부터 칙사( 勅使)라는 것이 오면 왕이 나아가 맞이하는 곳으로, 이를테면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요, 속국 조선은 상국인 중국에 이렇듯이 잘 복종하고 있고 하다는 것을 표증하는 물건들이었다. 따라서, 독립정신을 지닌 조선 사람으로서 볼 때에는 국치기념물(國恥紀念物)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독립협회에서는 이 국치기념물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부수어 독립관을 만들고 하였다.
이 영은문을 헐어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에다 독립관으로 현판을 갈아 붙이고 한 사실은, 조선의 자주독립이 조정의 외교교섭이나 또는 외국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한 국민운동으로서 민중의 힘으로 일으켜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또는 정부에 대하여서나 큰 충동과 자극을 준 것이 있었다.
독립관에서는 일요일마다 강연회나 토론회가 열리었다.
서재필을 비롯하여 박치훈(朴致勳), 최정덕(崔廷德), 윤치호 같은 지식 분자, 또는 열 있고 기개 좋은 이상재, 장붕(張鵬), 이승만, 이런 사람들 이 연사가 되어, 민권사상이 무엇이며 외국 ─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적인 실정을 말하여, 조선이 민주주의적이 아님을 지적하고, 앞으로 크게 민권이 신장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속국으로서 욕되게 살아온 역사를 폭로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외국이나 정부의 손에 맡길 것이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자주독립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정부를 공격하였다.
왕이 일개 외국의 공사관에 가 감금이 되어 있다시피 하되,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보고만 있는 정부의 무능을 공격하였다. 그러면서 하루바삐 왕 이 궁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국가의 중요한 이권이, 정부와 국민이 모르는 사이에 자꾸자꾸 외국 사람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실정을 폭로하며 반대하였다.
지방관원의 여전한 학정과 불법과 토색질을 폭로하여, 책임이 중앙정부에 있 음을 말하였다.
아무것도 숨김이 없고 기탄할 것이 없고 두려워함이 없이, 그른 것을 치고 바른 것을 추앙하며 주장하였다.
강연하는 인사의 말은 불을 뿜는 듯하였으며, 태도에는 열과 정성과 기운이 넘치었다.
강연과 토론회가 열리면 독립관은 청중으로 미어졌다. 넓지 못한 대청은 먼저 온 사람으로 가득차고, 늦어 당도한 사람들은 수백 명씩이 바깥으로 모여 섰고 하였다.
그들은 일찌기 이처럼 참신한 말과 정당한 말과 그리고 통쾌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흥분하여 강연을 들었으며, 독립관이 무너질 듯 요란한 박수 로써 연 사의 말이나 주장에 동의를 표시하고 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일변 서재필이 주재하고 윤치호가 편집을 맡아 영문( 英文) 과 조선말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독립신문에서도 역시 강연이나 토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민권사상과 독립 정신과 개혁사상을 고취하였음은 물론이었다.
독립협회의 행동은 국민들도 처음 구경하는 노릇이었지만, 정부로서도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정부는 이렇게 대담하고 노골하게 조정의 하는 일을 공격하며 반대하는 민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국민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즉 법에 비추어 보아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처음에는 분간조차도 하지 못 하였다.
미상불, 아무리 둘러보아야, 백성이 모여서 조정을 공박하고, 조정이 하는 일을 반대하고 하는 데 대하여 그것을 금할 만한 법령은 정부로서 가지고있는 것이 없었다. 부득불 있다고 하면, 왕이 전재권을 행사하여 칙령으로써 막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었었다.
일찌기, 야소교와 미국 계통의 지사랄지 대신과 정객들이 중심이 되고, 개화당과 친로파의 인물도 섞이고 한 사교단체 정동구락부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독립협회는 정동구락부의 후신이라고 함직한 것이었었다.
독립협회는 태생이 그렇게 미국 냄새가 나는 정동구락부인데다, 설도 하고지도 하는 서재필, 윤치호 들이 미국패요, 실지에 있어서도 미국공사로 와있던 시일이며 알렌이며, 그리고 배재학당의 아펜젤러, 제중원의 에비슨, 언더우드, 이런 당시에 왕의 신뢰를 받고, 궁중에도 자주 출입하고 하는 미국 사람들이 등 뒤에서 많이 원조를 하고 하기 때문에, 자연 친미적인 색채가 농후치 아니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독립협회가 앞으로 더 자라, 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치 투쟁을 하게 된다면, 배후의 미국 세력이라는 것도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 하는것 일 것. 그때에 가서 독립협회가 과연 원조와 간섭을 잘 분간 하여 받을 것 같고, 물리칠 것 물리치고 할 현명한 역량이 갖추어져 있다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를 못하는 날이면 독립협회 역시 개화당과 일본파가 실패한 길을 밟고 말 것이나 아닐지는 모르는 노릇이었었다.
독립협회는 아뭏든 자랐다.
국민의 지지가 서울 장안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지방에까지 미치고.
열 있는 회원이 불고.
일하는 솜씨가 늘고.
독립협회는 마침내 독립관의 좁은 대청에서 회원끼리만 모여 강연회나 토론회를 열고, 회원끼리만 듣는 데서 민권을 주장하고 정부를 공격하고 하는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회장을 대담히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회원 말고도 더 많은 민중의 앞에서, 민중과 더불어 일을 하자는 것이었었다.
독립협회가 회장을 옥내로부터 가두로 옮겨 종로 네거리로 나오면서부터는 그 연설하고 토론하고 하는 것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고 이름 하였다.
만민공동회는 거진 날마다 열리었다.
만민공동회는 정부의 대신을 불러다 앉혀놓고, 민중이 보고 듣는 면전에서 정부를 공격도 하고, 개혁의 실제 방법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독립협회가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열던 전후하여, 일본 유학을 하고 있던 많은 청년 학생들이 다투어 고국으로 돌아와 독립협회에 가담을 하였다.
만민공동회와 그리고 일본 유학생들의 참가는, 독립협회의 정치적 색채와 행동을 일단 더 선명케 하였다.
한편, 일본 망명의 개화당들과도 연락이 생기고, 박영효에게서는 적지 아니한 운동자금이 오기까지 하였다.
노상 귀머거리나 청맹과니 아닌 정부에서는 비로서 독립협회를 경계 하기 시작 하였다.
독립협회가 왕을 내쫓고, 윤치호를 올려앉혀 미국처럼 대통령을 삼는 다 더라…… 이런 풍설이 떠돌았다.
오래잖아 박영효가 돌아와 갑신정변 같은 변을 꾸민다더라…… 이런 풍설도 떠돌았다.
정부는 잔뜩 겁이 나 가지고, 독립협회를 그대로 두었다는 아무 때 봉변을 하여도 톡톡히 봉변을 하고 마는 것이라고, 그러니 어떻게든 이것을 뚜 드려 엎어야 하는 것이라고 단단 벼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독립협회대로, 종로 네거리까지 나와 매일같이 목이 터지도록 민권을 주장하고, 썩은 정부를 공격하며 개혁을 부르짖고 하여도, 정부에서는 전혀 묵살을 하고, 조그마한 반응이라는 것이 없었다.
이에 독립협회는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실재적인 직접운동을 가지지아니치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광무(光武) 2년 무술(戊戌) 시월 스무여드렛날, 만민공동회를 열던 종로 네거리 그 자리에서, 만민공동회 대신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는 것을 열게 된 것이 그 실제적인 직접운동의 첫걸음이랄 것이었었다.
선용은 매부 영석과 함께 일찌감치 점심을 마치고, 관민공동회가 열리는 종로로 나왔다.
한가을…… 햇빛은 맑고, 높다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한껏 푸르렀다.
육조(六曹)앞으로 좇아 황토현 척화비(斥和碑) 옆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이 벌써 종로 네거리 쪽으로 향하여 꾸역꾸역 몰려가고 있었다.
종각 앞으로 단을 모아 연단을 만들고, 연단 바로 앞이 특별석…… 특별 석에는 걸상을 수십 개 벌여놓았고.
일반 회원석은 거적을 여러 백닢을 펴, 그 위에 가 앉도록 마련이었다.
선용과 영석이 회장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회원석은 벌써 앞쪽으로 절반이나 차 있었으나, 특별석은 간부 몇 사람이 혹은 앉았고 혹은 오락가락 할 뿐이지, 오늘 회의 주최의 중심이랄 수 있는 정부의 각 대신들은 아직 와있지 아니하였다.
영석은 선용을 데리고 넌지시 특별석 가까이로 와, 간부들을 누가 누구요 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저쪽으로 나란히 앉은 두 사람 가운데, 뚱뚱한 이가 이상재, 가냘픈 이가 이승만이요, 이쪽으로 혼자 우두커니 앉아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방한덕이요, 부리나케 시방 특별석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이 회에서 하도 반대를 잘 하여, 남궁반대 남궁반대 하는 남궁억( 南宮檍) 이요 하다고.
영석은 병신년 이월, 아관파천으로 개화당이 몰락이 되고, 이어서 그해 가을 독립협회가 생기자, 독립협회와 개화당은 진보적인 점에 있어 서로 일맥상통 하는 것이 있고, 한편 영석으로 말하면 제중원에 다니던 관계로 하여 친미적인 경향을 가졌고 하였기 때문에, 즉시 독립협회에 들어 가지고, 이래 열심한 회원 노릇을 하여 왔었다.
선용은 영석을 만나, 독립협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자상히 들었고, 매우 흥미를 느끼었다. 그리고 오늘 열리는 관민공동회로 말하면, 정부 대신을 청하여다 관민이 한 자리에서 국정을 토의하고 혁신안을 결의하여, 그것을 그대로 시행을 하도록 정부에 요구하고, 하기 위한 회라고 하는 데 대하 여서는 한층 더 깊은 흥미와 더불어 큰 기대를 가지고 회에 참석을 한 것 이었었다.
이윽고 남녀를 타고 구종을 거느린 양반 행차 하나가 당도하였다. 키가 후릿하고 얼굴이 해사한 그 양반이 외부대신 이완용이라고 영석은 선용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완용은 배재학당에도 다녔고, 배재학당에 다닐 때에는, 점심때면 학교에서 고깃국을 끓여 학생들을 주고 하였는데, 하루는 어떡하다 고깃국을 끓이지 아니하였더니 이를 괘씸타 하여, 교장 아펜젤러를 잡아 엎어놓고 볼기를 친 삽화의 주인공이었고, 정동구락부 적부터의 회원이요 하였다.
한참 있다 총리대신 박정양과 내부협판 김중환이 오고, 또 한참 있다 법무대신 조병식이 오고, 또 한참 있다 탁지부대신 윤용구가 오고 하였다.
이렇게 대신들의 행차가 늘어지고 띄엄띄엄하여, 각부 대신이 대강 다 모 이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하였다.
회원은 오래 전에 이미 모일 대로 모여, 좌석은 찰 대로 다 차고, 넘친 사람은 가로 둘러서고 하였다.
이상재가 연단으로 올라섰다. 회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하였다.
그동안까지 회장이던 윤치호는, 윤치호가 대통령이 되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풍설이 돌자 회장을 사임하고 나오지 않았고, 이상재가 회장 노릇을 하였었었다.
이상재는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시방 우리 나라의 정치로 말하면,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대단히 문란합니다. 도무지 무엇 한가지 절차를 밟아 규칙 있게 되어가는 것이 없 읍니다. 가령 재정(財政)을 놓고 봅시다. 대범, 국가의 재정이라고 하는 것은 탁지부에서 그것을 관리를 하도록 마련이 아니겠읍니까?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탁지부라는 것이 있기는 있되, 세전이랄지 혹은 달리 국고( 國庫) 로 수입이 되는 돈이, 탁지부로는 몇푼이 들어가지를 못하고서, 거지반 다 내장원( 內藏院), 왕실의 사사회계를 맡은 내장원, 글러루 들어갑니다그려. 들어가 가지고는,무엇에다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게 흐지부지 다 없어지고 마는군요.
요란한 박수 소리에 섞이어 옳소.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일었다.
이상재는 이어서 그러고는, 정부에서는 돈이 없어서 쩔쩔매고, 관리들 월급도 못 주고, 외국에서 차관 ─ 빚 얻어올 궁리들이나 하고 앉었고…… 이상재는 그러면서, 싱긋 웃으면서 특별석의 정부 대신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회원석에서는 웃음 소리와 박수 소리와, 옳소 하는 고함 소리가 한꺼 번에 터져 나왔다.
이상재는 그 구수한 말솜씨와 능청스런 몸짓으로, 곧잘 이렇게 청중을 웃겨놓곤 하였다.
이상재는 다시 계속하여 외교의 문란함을 말하였다.
당연히 우리의 손으로 개발을 하여 우리 나라를 부강케 할 광산, 철도, 삼림, 이런 여러 가지의 중요한 이권이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자꾸 자꾸 외국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런 후에 결론으로, 나라의 정치가 그와 같은 문란하여서는 나라는 필경 망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국민 되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만 앉았는것은 도리에 어그러진 일이다. 우리는 상하와 관민이 한가지로 떨치고 일어서서 이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여야 할 것이요, 오늘날 여기에 관민 공 동 회를 연 뜻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말로써 개회사를 마치었다.
갈리어, 남궁억이 연단으로 올라섰다.
회원의 박수.
남궁억은 무엇인지 적은 종이쪽을 탁자 위에 펴놓고는 오늘날 우리 나라 정치를 바로잡자면, 비단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을 다 바로잡자면, 한 번 두 번이나 하루 이틀에는 도저히 어려운 일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중 급한 것을 몇 가지만 추려 가지고, 어떻게 개혁을 했으면 좋겠다는 초안을 만들어 보았읍니다. 그것을 본인이 주욱 한번 읽어 드리고 나서 ,다시 한 조목 한 조목을 들어 여러분의 의견을 묻기로 하겠 읍니다.
남궁억은 탁자 위에 펴놓았던 종이쪽을 집어들고, 일단 높은 음성으로 읽는다.
1. 외국인에게 의뢰 의탁치 말고 관민이 동심합력하여 전제 황권( 專制皇權)을 굳게 할 것.
2. 광산, 철도, 전기, 삼림, 이런 이권이랄지 차관(借款), 차병(借兵) 기타 외국과의 조약이랄지 이런 것은 각부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다같이 이름을 쓰고 도장을 치고 한 것이 아니면 실시치 못할 것.
3. 재정은 탁지부에서 관리하되 다른 부에서는 간섭치 못할 것이며, 예산과 수지결산(收支決算)은 국민에게 공포를 할 것.
4. 중대한 범죄인은 공판을 하되, 피고가 자백을 한 후에 비로소 법률로다 스릴 것.
5. 칙임관은 왕이 정부에 자문하여, 각부 대신의 절반 이상의 동의가 있은 다음에 임명을 할 것.
6. 장정(章程)을 실천할 것.
남궁억은 읽기를 마치고 나서이 여섯 조목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다시 한 조목 한 조목 읽어 드릴테니 가하면 가하다, 불가하면 불가하다 말씀을 하십시오. 자, ① 외국인에게 의뢰 치 말고, 관민이 동심합력하여, 전제황권을 굳게 할 것……어떻습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수 소리와 좋소, 옳소 소리가 땅이 깨질 듯 요란히 일었다.
남궁억은 그 다음, 대신들을 내려다보면서 정중히 묻는다.
"정부의 대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대신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 좌우를 돌아보는 사람뿐이지, 아무도 대답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가하면 가하다고, 불가하면 불가하다고 빨리 대답을 하십시오."
남궁억의 재촉에, 마지 못해 그중 몇이 좋소 하고 대답을 한다.
"정부의 대신 여러분께서도 가하다는 의견이십니다."
남궁억이 회원들에게 이렇게 선포를 하자, 회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냄으로써 대신들을 칭찬하였다.
대신들이야 속으로는 도무지 성가시고 긴치가 않았으나,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였다가 이 말성꾸러기 독립협회에게 두고 두고 무슨 욕을 먹으며,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모를 노릇이라, 그것이 꺼리어 마지못해 한 대답인 것은 물론이었다.
남궁억은 다음 조목으로 옮아가 "광산, 철도, 전기, 삼림 이런 이권이랄지 차관, 차병 기타 외국과의 조약이 랄지, 이런 것은 각부의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다같이 이름을 쓰고 도장을 치고 한 것이 아니면 실시치 못할 것…… 이것은 어떻습니까?"
회원들은 먼저와 같이 박수와 좋소 옳소 소리로 찬성을 하고.
대신들은 그들 역시 먼저처럼, 그중 몇 사람이 간단히 좋소 하였고…… 갈데 없는 절에 간 색시였었다.
이렇게 해서, 여섯 가지의 개혁안은 아무려나 관민공동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가 된 셈이었다.
남궁억은 관민이 이와 같이 열렬히 개혁안에 찬성하여 준 것을 감사 한다는 치하의 말을 한 후에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서 천 가지 만 가지의 좋은 안을 토의하고 결의하고 했다고 하더래도, 그것이 실시가 되지를 아니하면 아무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옳소."
회원석에서 맞장구를 치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다시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결의한 그 여섯 가지 개혁안을, 총리대신 이하 각 대 신 이대 황제폐하( 大皇帝陛下: 王)께 상주를 해서, 윤허(允許)를 받자와 정부로 하여금 즉시 그대로 실시를 하도록…… 어떻습니까?"
박수와 옳소 좋소 소리가 한결 더 맹렬할 뿐 아니라, 벌떡벌떡 일어서서 팔을 쳐들고 휘저으면서 고함을 치는 회원도 여럿이 있었다.
남궁억은 회원석이 진정이 되기를 기다려 특별석의 대신들더러 묻는다.
"정부의 대신 여러분께서는 의견이 어떠십니까?"
대신들은 여간만 딱하지가 않았다.
세상 거북한 일을 떠맡게 되는데, 그렇다고 만일 못한다고 하여서는 당 장저 흥분해 날뛰는 녀석들(회원들) 앞에서 무슨 봉변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 이었다.
남궁억은 대신들의 얼굴을 주욱 훑어보았다.
모두가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완고하고 고집불통으로 이름난 법부 대신 조병식만은 잔뜩 골이 나가지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장히 봄직한 것이 있었다.
조병식은 속으로 ' 이 발칙스런 놈들이, 이 앙뚱스런 놈들이…… 이놈들을 당장 붙잡아 들여다 치도곤을 안겨야지, 이런 흉악한 놈들이 있더람?’ 하고 분개하면서 벼르는 속인 것이 역력하였다.
곧기만 하였지, 물정 모르는 완고장이 늙은 조병식으로는 또한 그럼 직도한 노릇이었다.
남궁억은 총리대신 박정양과 얼굴이 마주쳤다.
얼굴이 마주친 채 남궁억은 눈으로 대답을 재촉하였다.
박정양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답이었다.
"여러분의 의사가 그러시다니 시키시는 대로 해보리다."
박정양은 사람이 한갓 춘풍샌님으로 중추가 굳고 적극적이고 하지는 못 하였으나, 일찌기 전권대사로 워싱턴에 가 미국 바람도 쏘이고 한 인물이니 만큼 쓰잘데없이 완고스럽거나 또는 음험한 구석이 있거나 한 것은 없었다.
선용은 영석과 함께 흩어지는 군중에 섞여 돌아가면서, 생후 처음으로 오늘 재미있고도 속 후련한 꼴을 보았노라고, 나도 독립협회에 들어 하다못해 심부름꾼 노릇이라도 하면서 같이 일을 하겠으니, 천거를 하여 달라고 하였다.
박정양은 언약대로 독립협회가 관민 공동회에서 결의한 여섯 가지 개혁 안을 상주한 결과 왕은 즉시 윤허를 할 뿐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1. 언로(言路:言論)의 자유를 줄 것.
2. 언론과 집회의 조례를 정할 것.
3. 지방관리의 불법과 토색을 엄히 처벌할 것.
4. 어사, 시찰원(視察員)의 작폐하는 자를 조사하여 처벌할 것.
5. 상공학교(商工學校)를 설시할 것.
이런 다섯 가지 조목을 더하여 곧 실시하도록 명하였다.
왕은 독립협회의 운동에 대하여, 그것이 순전한 평화적인 운동인 데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었다. 맨처음 독립협회가 종로에서 관민 공 동 회를 열던 날 밤에는 윤치호와 이상재를 궁중으로 불러, 회의 취지와 운동 방침 같은 것을 묻고, 목적이 좋으니 열심히들 하라는 격려의 부탁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 뒤로 독립협회에 대하여 좋지 못한 여러 가지 풍설이 떠돌고, 또 법부 대신 조병식이니 내부협판 김중환이니 하는 축들은, 늘 있는 말 없는 말 꾸며 대어 왕의 앞에서 독립협회를 모함하고 훼방하고 하였으나 왕은 그것을 전적으로 곧이듣지는 않았었다.
독립협회에서는 왕이 그렇듯, 독립협회의 제안을 승인할 뿐 아니라 자진 하여 중요한 개혁안을 다섯 조목이나 더 보태어 곧 실시하도록 정부에 명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운을 얻었다.
그리하여, 11월 5일날 또다시 관민공동회를 열고, 보다 더 범위가 넓고 적극적인 운동을 일으키되, 가령 정부의 현임 대신 가운데 혁신정치를 담당 하기에 적당치 못하다고 인정하는 인물은 이를 갈아 없앨 것을 주장하기로 하는 등, 간부 일동은 방침을 상의하고 진행 준비를 하고 하기에 분주하였다.
선용은, 일이야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회관으로 가 회원들이 하는 이야기에서나, 혹은 간부 누가 무심코 흘리는 말 한마디에서나, 그것으로써 저의 식견을 늘리고 하기에 열심하였다.
계획과 준비는 다 되어 내일이면 크게 관민공동회를 열어 한바탕 일을 해치운다던 그 안날 ─ 십일월 초나흗날 정밤중이었다.
별안간 경무청으로부터 순검과 별순검(刑事)이 여러 떼가 일제히 독립 협회의 회관을 비롯하여 사처로 풀려나와 이상재, 윤치호, 방한덕, 이승만, 남궁억, 장붕, 최정덕, 나수연, 박치훈, 박진수 들의 간부 열일곱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의 문부를 압수하고, 그리고 독립협회 해산의 칙령이 내리고하였다.
이유는, 독립협회가 11월 5일날 일제히 들고 일어나서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 때와 같이 폭력으로 변을 일으키어, 정부의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하되, 더우기 이번에는 왕을 폐하고, 독립협회의 간부 누구로 대통령을 삼고 할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었다. 그리고 증거 재료는 어떤 자의 투서라고 하였다.
독립협회는 그야말로 어둔 밤에 홍두깨요, 마른 하늘의 벼락이었다.
이 소식을 아는 회원이나 모르는 회원이나 예정한 닷샛날, 회원들은 종로 네거리에 미어지도록 모였다.
회원들은 흥분하여 즉시 경무청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열고, 고영근( 高永根) 이 임시회장이 되어 정부당국의 불법을 공격하면서 체포한 열 일곱 명의 석방을 부르짖었다.
체포된 열일곱 명 간부는 경무청으로부터 재판소로 넘어갔다.
독립협회는 다시 재판소 앞에다 만민공동회를 붙이고, 여러 천 명 회원 이모여 사오 일을 두고 밤이나 낮이나, 비바람 상관 없이 흩어질 줄 모르고 정부를 공격하는 연설을 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 많은 군중이 경무청 앞에 모여서 혹은 재판소 앞에 모여서, 밤과 낮으로 며칠씩을 두고 정부 공격의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체포된 범인의 석방을 요구하고 하면서 흩어지지 않고 하였건마는, 경찰은 그를 해산 시키려고 총 한 반 쏘는 법 없고, 아무리 과격하게 정부를 공격하여도 연사 한 사람 검속하는 법 없고 하던 것을 보면, 이때에 경찰이 어수룩하였다고 할 것인지, 차라리 문명하고 민주주의적이었다고 할 것인지.
체포된 간부 열일곱 명은 재판소로부터 감옥으로 넘어가고, 만민 공 동 회는 종로 네거리로 도로 회장을 옮았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독립협회를 무함한 법무대신 조병식, 내부 협판 김중환 들을 파면할 것, 독립협회 해산의 칙령을 철회할 것, 전일의 개혁 안 여섯 조목과 및 다섯 조목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부에서는 들은 성도 아니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정부가 그와 같이 민론(民論)을 무시할지면 정부를 젖혀놓고, 왕께 직소(直疏)를 올리는 것도 또한 방법이라 하여, 명동(明洞) 장악원( 掌樂院)을 소청(疏聽)으로 정하고, 치소원(治疏員)을 뽑아 즉시 소를 닦게 하였다.
11월 15일날에는 첫소(初疏)가 들어갔고, 이어서 재소(再疏)가 들어가자, 왕으로부터 비지(批旨)가 내 리기를 "소사( 상소의 뜻)는 마땅히 유념을 할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 각기 생업에 힘쓸지어다."
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그런 어리무던한 대답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삼소(三疏)를 올렸다.
올리되, 이번에는 재래 유생들이 하듯이, 복합정소(伏閤呈疏)의 법식으로 하였다. 궐문 밖에 엎드려 소를 올리고, 만족한 비지가 내릴 때까지 엎드려있는 채 물러가지 않는 것이 복합정소라는 것이었었다.
21일 이른 아침, 오백 명 가량으로 된 독립협회의 소원(疏員)이 덕수궁 인화 문( 仁化門) 앞에 일제히 엎드렸다.
오백 명의 소원은 일찌기 보지 못하던 장관이었다.
장안의 인심은 수수하였다.
독립협회는 다른 사람과 달라 저럭허다 필경 무슨 변을 일으키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소원들이 만일 한걸음이라도 궐문 안으로 들어서면, 그대로 대고 쏘아대 려고 대궐 안에는 마침 복병을 묻어놓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경무청에서 순검을 있는 대로 풀어, 소원들을 죄다 묶어가려고 시방 포승을 불시로 많이 장만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는 날이면, 독립협회 사람들이 누구라고 만만히 포박을 질 리가 없고, 정녕 싸움이나 갑신· 을미적의 변이 또 일고 말 것이니, 진작 피난이라도 갈까보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럭저럭 오정이 되었다.
독립협회의 소원들은 아직도 소장도 올리지 못하고들 엎드려 있는데, 그러자 과연 변이 났다. 독립협회가 변을 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변을 만났었다.
정동 쪽으로부터 웬 패랭이 쓰고 탑골치 미투리에 날아갈 듯 감발하고, 손에는 제마다 율무작대기를 들고 한 장한들이 이백 명인지 삼백 명인지 골목이 미어지도록 우우 달려들어, 이놈들 역적놈들 하고 호통을 하면서 다짜고짜로 소원들을 두들겨패었다.
무심코 엎드려 있다가 불의에 습격을 당한 소원들은, 창졸간에 더구나 맨 주먹으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장한들은 범같이 날뛰면서, 이놈 치고 저놈 갈기고 개잡듯 두들겨팼다.
두들겨 맞으면서, 소원들은 뿔뿔이 풍겨 달아났다.
선용은 결기에, 한 놈의 율무작대기를 뺏어 들고 대항을 하였다.
선용의 갈기는 율무작대기에 얻어닿는 놈은, 미상불 한 대에 쓰러지고 쓰러지고 하였다.
그러나, 열이나 스물이라면 몰라도 이삼백 명 총중에 뛰어들어 율무 작대기 하나를 휘두르면서 단신으로 날뛰어 보았자 결과는 번연한 노릇이었다.
한참 정신없이 날뛰다 보니, 겹겹이 에운 적의 무더기 속에서 혼자 처져있는 것이었었다.
정부에서는 얼마 전부터 각도의 등짐장사패(負商[부상]패)를 서울로 불러 올려,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것을 조직케 하였었다.
갑신년에 상리국(商理局)이라고 하는 것을 두어, 등짐장사패를 감독 지도 하다 미구에 흐지부지하고 말았는데, 그 상리국을 다시 설시한다는 핑계 였으나, 실상은 독립협회와 대항할 수 있는 정부편의 폭력단을 가지기 위 하여, 두목 이기동(李起東)과 은밀히 짜고 각도로부터 이천 명 가까이 등짐장 사 패를 불러올려 마포에다 묻어두고 기회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 날,인화문의 독립협회의 소원을 엄습한 것은 그 중의 선발 대였었다.
주의 주장이나 지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갓 재물에 팔리어 반동 세력을 싸 주는 무리들…… 이것은 낡은 것이 물리어나기를 발악하는 시절, 즉 말세에는 어느때고 그런 것이 횡행을 하는 법이었다.
지나간 병인양요(丙寅洋擾) 적에 대원군은 이 등짐장사와 도한( 屠漢: 白丁[ 백정]) 들을 불러올려 군량의 운반 같은 것을 시켜 효과를 보았고, 이어서 서울의 성을 중수하는 데 그들 등짐장사패와 도한들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 하게 한 일이 있었다.
명색이 없고 무지하며 막된 무리들이라 그런 것이나마 권세라고 가지게 되자, 이를 기화로 행악이 대단히 심한 것이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부역꾼들을 함부로 꾸짖고 때리고 하는 것은 예사요, 거리로 패지어 다니면서 외상술 먹고 야료 놓기, 무단한 사람 붙잡고 시비 걸어 구타 하기…… 그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 장안 안 백성들은 등짐장사패라면 아주 질색을 하고, 동저고리 바람에 패랭이 쓰고 율무작대기 짚은 놈이라면 얼씬만 하여도 미친 개를 만난 것처럼 꺼리어하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이 표방하기를, 우리 황국협회는 찬역을 도모하는 독립 협회의 무리를 쳐 없애고, 을미년의 국모의 원수를 갚으며, 왕실을 태안 히 받들며 한다는 것이었으나, 가사 그 표방이 동감이 되는 점이 있기는 있더라도 보기에조차 흉악스런 그들을 환영스럽게 생각하는 백성은 별로이 없었다.
이튿날 석양.
선용은 길쭉한 몽둥이 하나를 장만하여 가지고 매부 영석과 함께 집을 나섰다.
머리를 싸 동이고 다리는 절름절름 절고 하면서도 그는 나섰다. 어제 인화 문 앞 싸움에서 머리통과 다리와 그밖에 여러 곳을 다쳤었고 퍽 위험한 지경을 가까스로 면해 나왔었다.
가뜩이나 다치기알라 한 사람이 번연히 오늘도 나가는 날이면, 힘만 믿고 함부로 날뛸 것이라 하여 누이 내외는 절절히 만류하였으나, 선용은 도리 어, 내가 신학문이 도저한 바 아니요, 언변이 있어 연설 한마디 할 수 있는 잡이도 아니요, 있는 기운으로나 이런 때 회를 위하여 한몫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면서 듣지 아니하였다.
서대문 밖 아현고개에서 쳐들어오는 등짐장사패와 막는 독립협회가 대 치가 되었다.
등짐장사패는 한 육칠백 명 되었다.
독립협회는 천 명이 넘었다.
수효로는 독립협회가 우세하다고 할 것이나, 독립협회는 매양 책상 물림의 선비 들이었다. 다같이 몽둥이를 들고 싸우기로 들더라도 독립협회 세 사람이, 등짐장사패 하나를 당해내기도 오히려 부칠 형세였다. 기운 세고, 날쌔고, 율무작대기 잘 쓰고 하기로 이름난 등짐장사패가 아니던가.
무기는 등짐장사패가 주장 율무작대기인 데 대하여, 독립협회는 주장 몽둥이와 죽창 같은 것이어서 무기에 있어서도 독립협회가 하등의 손색이 없다아니 할 수 없었다.
그 밖의 무기로는 창과 군도가 양편에 몇 자루씩 있었으나 그다지 많은 것은 못되었다.
양편에서는 마주 대치를 한 채 서로 함성을 지르면서, 약간 돌팔매 질이나 할 뿐이지, 어느편에서고 와락 짓쳐나가지는 않았다.
선용은 기운이 불끈불끈 나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제와는 달라 이만한 수효에다 각기 손에 든 것도 있고 하니 왁 그대로 짓 쳐 들어가면 놈들은 죄다 뚜드려 잡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휘자는 좀처럼 돌격명령을 내리려고 아니하였다.
저물기 쉬운 가을 해가 인왕산 머리로 깜박 넘어갔다.
마악 그때였다. 남대문 쪽으로부터 요란한 함성이 일었다.
역시 짐작한 대로 등짐장사패에서는 그쪽으로 좇아 기습을 하여온 모양 이었다.
남대문은 수비가 약하였다. 아현에서는 3분지 1 가량을 덜어 급히 남대문으로 응원을 보냈다.
세가 덜리는 것을 보고 아현의 등짐장사패에서도 돌격을 하여 나왔다.
독립협회의 저항은 맹렬하였다. 그러나 도시가 달리는 싸움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부터는 연방 몰리기 시작하였다.
선용은 불호랑이같이 날뛰면서 싸웠다. 한 삼십 명 넉넉히 때려눕힌 성 싶었다. 물론 선용 저도, 그러는 동안 골통 이하로 팔, 등짝, 다리 여러 곳을 많이 다쳤다.
아무리 혼자서 용맹하고 날쌔게 날뛰어도, 싸움이 대체가 기우는 데야 무가 내하였다.
선용은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분한 깐으로 하면 한 몽둥이에 여남은 놈씩 때려잡았으면 싶었으나, 그렇게 하는 재주는 없었다.
저기만치서 한 놈이 손에 가진 것을 놓쳤던지, 맨손으로 쫓기어 달아나고있는 이편 하나를 율무작대기를 휘두르면서 쫓아가고 있었다.
선용은 쏜살같이 그 뒤를 쫓아가, 어깨를 겨누어 내리치는 한 대로 놈을 쓰러 뜨 렸 다.
마악 그러고서, 미처 몸을 바로 잡기도 전인데 "이 놈?"
하는 소리와 함께 바른편 어깨 밑이 뜨끔하였다.
홱 몸을 돌이키는데, 창끝은 재차 앙가슴으로 육박하였다.
그대로 와 찌르는 날이면 그만 목숨을 앗기고 말 그 아슬아슬한 창 끝을, 날쌔게 몽둥이로 쳐 받은 것은, 일찌기 본집에서와 병영 시절에 약간 방수를 익힌 검술(劍術)의 덕이었다고 할 것이었다.
창 든 놈까지는 때려눕였으나 둘러보니 맨판 패랭이 쓴 놈 판이요, 어젯 날인화 문 앞 그때의 형세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구나 창에 찔린 어깨는 바른편이요, 그래 바른팔이 힘이 풀리기 시작하고 하여, 선용은 무모히 덤비기를 피하고 빼쳐 달아날 도리를 차렸다.
이 날 싸움에 독립협회는 한 명이 죽고 근 삼백 명이 상하고, 등짐장 사 패에서는 한 백 명이 상하였을 뿐이었다.
독립협회와 등짐장사패와의 싸움은 날마다 붙었다. 그리고 싸우는마다 독립 협회는 쫓기었다.
일변 정부에서는 따로이, 경찰을 시켜 밤으로 찾아다니면서 독립협회의 중견 인물을 체포하였다.
독립협회는 일본인 거류지 왜성대(倭城臺)로 피하여 들어갔다.
정부에서는 일본공사관에 대하여 독립협회를 쫓아내도록 요구하였다.
일본공사 가등(加藤)은 진작부터 조선정부에 대하여,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주도록 교섭을 하였으나 조선정부가 잘 듣지 않던 차인데, 그러면 왜성대 로부터 독립협회를 몰아낼 테니,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주겠느냐 하였다.
조선정부는 그래라 모르겠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경부선 철도부설권은 일본정부의 손으로 넘어가고, 왜성대에 서는 독립협회가 몰리어나고 하였다.
장안 안은 이미 등짐장사패의 천지가 되어 열만 모여도 와 습격을 하고, 밤이면 경찰에게 개별적으로 쫓기고, 안전지대이던 왜성대에서는 들여주지를 않고, 독립협회는 꼼짝달싹을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별안간 서울 장안에는 일찌기 없던 굉장한 사건이 일어났다. 평일에 소행이 아름답지 못하거나 독립협회를 미워하던 정부 대신과 고관과 친로파와 황국협회의 간부와, 이런 사람의 집에 연방 폭발탄이 터지고 하던것이었었다.
십이월 초엿샛날 밤, 정동에 있는 이용익(李容翊)의 집에 첫 폭탄이 터졌다.
이용익은 한낱 감역(監役)으로, 걸음 하나 잘 걷는 것으로 발신을 하여 후일 대신까지 지냈지만, 사람이 무식하고 조백이 없을 따름이지, 악랄하거나 탐학한 편은 아니었는데, 때에 궁중의 재정을 도맡아 보았고, 겸하여 친로파로 지목이 되었었다.
주인 이용익은 무사하였으나, 집은 탈싹 무너지고 그대로 불이 나 타 버렸다.
다음날은 장교(長橋)의 박정양의 집에, 그러나마 대낮에 폭탄이 터져 박정양 역시 마침 집에 없어 무사하였으나 사환 이하 몇 사람이 즉사하였다.
같은 날 밤에는 내수사의 이유인(李裕寅)의 집 사랑에 연거푸 세 방이 터졌다.
무당 진령군의 충신 노릇하다 대신까지 지낸 그 이유인이었다.
장안 안 사람은 위로는 왕과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떨고 무서워하였다.
난데없이 꿍 하면서 집을 무너뜨리고 불을 뿜고, 집을 불태우고, 그리고 사람을 상하고…… 세상에 이런 무서운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 같은 것은 차라리 약과였던 성 싶었다.
정부와 경찰에서는 정녕 독립협회의 소행이거니 하여 기를 쓰고 엄히 밝히었으나, 증거도 범인도 잡혀지지를 아니하였다. 폭탄만 보아란 듯이 여전히 꿍꿍 터졌다.
계속하여 여드레 동안을 두고 폭탄은 터졌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인 12월
13일 밤, 일본으로 망명을 간 후 항옥(恒屋)이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는 소 안동 박영효의 집에서 그야말로 서울 장안이 온통 떠나가는 듯 요란한 꿍 소리가 일면서 집은 한족이 무너지고 하였다.
그 자리를 검사한 결과, 세 사람의 시체와 폭탄을 만들던 여러 가지 연장 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범인은 독립협회가 아니라, 임병길(林炳吉) 일파인 것도 판명이 되었다. 임병길파가 독립협회의 별동대(別動隊)란 말도 있으나 적실한 것은 드러나지 아니하였다.
선용은 아현고개의 싸움이 있던 이튿날 아침, 매부 영석이 서둘러 교군에 실리어 남대문밖 제중원에 입원을 하였다.
창에 찔린 상처가 화농이 되느라고 열이 몹시 올라 며칠을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를 하면서 앓고 하였다.
한때는 매우 위험하여 주관하는 미국 사람 에비슨까지 나와 보고 걱정들을 하였으나, 그러나 요행 어려운 고패를 넘겼고.
상처가 완전히 합창이 되어 병원에서 나오기는 해가 바뀐 기해(己亥) 광무
3년, 바로 양력 정초였었다.
독립협회는 폭탄 사건 이후, 인화문 앞에서 왕의 친유(親諭)로 양편이 화해를 하였다는 것과, 간부들 가운데 몇은 감옥에 그대로 남아 있고, 몇은 외국으로 달리고, 또 몇은 정부의 벼슬자리에 팔리고 하여, 독립협회도 인제는 흐지부지한다는 이야기를 선용은 병원에 누웠으면서 영석에게서 자상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그렇게 된 것으로 선용의 실망은 대단히 컸다.
내가 신학문이 있고 연설도 할 줄 알고 인품이 장하고 하였더라면, 나라도 나서서 다시 한번 회를 일으켜 보았을 걸 하면서 못내 안타까와하였다.
선용은 영석에게 돈을 꾸고, 또 부탁하여 미국 사람들이 쓰는 좋은 사냥 총을 두 자루와 화약과 여러 길의 탄환을 많이와, 그리고 창, 잘 드는 군도, 단도 이런 것들을 두루 구하여 가지고, 이월 보름께 서울을 떠나 우선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사람도 하나고 둘이고 착실한 사람이 있으면 하던 차에, 거리에서 우연히 늙은 병정 퇴물 박돌이를 만나 데리고 동행하였다.
박돌은 선용이 소대장 시절에 병영에서 사귄 오십객의 늙은 병정이었다.
인간이 병신스런만큼 순박하고 고정하여, 나이는 피차 갑절이나 층이 지고 또 지체도 다르고 하였으나, 막걸리 한잔이라도 서로 나눠 먹으면서 매우자 별 히 지내던 사이였었다.
을미사변 때 박돌은 홍계훈의 거느린 경복궁 수직부대에 들었다가, 다리에 일병의 탄환을 맞고 이렇게 병신이 되어, 시방은 의지가지없이 날품이나 팔아 먹고 사노라면서, 왼편 다리를 잘름잘름 절었다.
10. 보 쌈 기해( 己亥) 광무 3년 삼월 보름.
삼월 보름이라지만 음력으로는 이월 초생,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초 봄이었다.
옥랑(玉娘)은 모처럼만에 건넌방으로 건너와 잠깐 요령으로 자리에 누웠다.
새서방 태진이 시감으로 며칠 동안 앓다 급자기 죽은 것이 어저께가 사십구 일이니, 꼭 오십 일. 그날부터 시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이내 앓았다.
노인의 병은 과부로 다 늙게 둔 외아들 하나를 그러나마 이십 전에 허망 히 잃고 낙망과 화에서 생긴 병이었다.
달리 손대가 있지도 아니한 터요 하여서, 옥랑은 늙은 시비 하나를 데리고, 꼬바기 시어머니의 병석에 붙박혀 앉아 두 달 장간을 약시중과 병간을 하였다. 그러느라고 제법 자리에 누워 변변히 잠을 자고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엊그제부터 노인은 병이 조금 차도가 있어, 미음도 마시고 밤이면 한 잠씩 잠도 자고,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하였다.
정신을 차린 노인은 며느리가 그동안 침식을 잊고 옆에서 주야로 병간을 하던 일을 깨닫고, 인재는 너도 건너가 편안히 잠을 좀 자고 하라고, 그럭허다 너마저 병이 나든지 하면 나를 위하는 도리가 무엇이냐고 걱정을 하면서 몇번 권을 하여, 옥랑은 더 어기지 못하고 시비에게 잠깐 시중하고 있도록 이른 후에 건넌방으로 건너왔었다.
등신이나마 새서방이 없는 자리에 혼자 눕기란 무한 허전하였다.
마디진 한숨. 그러면서 눈물이 좌르르 베개로 흘렀다.
콧물 흘리는 애기 새서방을 섬기기 여덟 해. 그 여덟 해를 길러 열 여덟이 되었다. 자랄 만큼 다 자랐었다. 그러나 팔십을 자라도 매양 그만일 사람 이었다. 그는 병신(不具者)이었었다.
그리고, 그러나마 죽었다.
겨우 인제야 스물네 살. 청상 과부. 앞으로 기나긴 생애를 외로이 외로이 살아가야 하였다. 낙도 없이, 여망도 없이 오직 한숨으로만.
그 한숨을 어찌 다 쉬는가 싶었다.
무엇에 매여 무엇을 하자고 이 생애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싶었다.
차라리 시집이라는 것을 오지 말고, 그대로 부모 슬하에서 부모나 섬기고말았더라면 나왔으려니 싶었다.
이 생각 끝에 문득, 어느 구석에 가 잠기어 있었던지 모르나, 까맣게 잊은 얼굴 하나가 어릿이 떠올랐다.
'그 장서방. 불 속에서 나를 살려내 주었다는 장서방, 옳아 참……’ ' 절을 하고 얼굴을 들다가, 옳아, 웃었지. 그 사람도 웃었지. 웃었어, 들……’ ' 그리고 참, 그 주머니랑, 염낭이랑, 허리띠랑……’ 여기까지는 기억이 무심코 즐거웠다. 그러나 이어서 ' 양반 쌍놈이 무엇인지 몰라. 그다지도 구별이 엄해야 하는 법인지……’ 할 때에는 소스라치게 한숨이 나오고.
'그때,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러시지를 마시고, 차라리……’ 하면서 또다시 한숨이었다.
마악 그러자, 옆문이 별안간 덜컥 열리었다.
놀라, 몸을 반만 일으키는데 어둠 속으로 검은 그림자가 열린 물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아이머니?"
목안엣 소리로 그러는데, 저편에서는 조용히 "도적이 아니니 놀라지 말아요."
하였다.
도적이 아니라는 데에, 옥랑은 오히려 가슴이 더럭하였다.
무서움보다도 악이 버럭 나고 겸해서 당돌한 천 품이라 "도적이야."
하고 고함을 쳤다.
궐은 마주 "포쌈이야."
하고 외치면서 성큼 달려들어, 가지고 온 홑이불에 뚤뚤 말아 옆에 끼고는, 옆 마당으로 내려선다.
옥랑은 홑이불 속에서 몸을 버둥거리면서 도적이야, 도적이야 소리를 지르고.
안방에서 시비가 놀라 "도적이야."
행랑에서 종이 몽둥이를 들쳐메고 뛰어나오고.
마당에서 둘이 마주쳤다.
"이눔."
종은 호통하면서 달려들었으나 몽둥이는 빗나가고, 궐이 한번 밀어 박치는 바람에 저기만치 가 떨어졌다.
"포쌈은 기를 쓰구 말리는 법 아냐."
궐은 조롱하듯 그렇게 나무라면서, 유유히 대문을 열고 나간다.
대문 밖에는 네패 교군이 마침 등대하고 있다가 선뜻 받아가지고는 나는듯이 그대로 달린다.
안에서는 종과 시비가 서로 가람 "도적이야."
"포쌈이야."
하고 고함을 쳐쌓는다.
이윽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보쌈인 줄을 알고는 장정들이 벌써 어느 지경을 간 지 모르는 가마 뒤를 쫓아가는 시늉 하다 돌아와 버렸다.
궐도 아까 한 말이지만, 과부를 보쌈하여 가는 것은 구태여 나서서 막으려고 서둘지 않는 것이 풍도였었다. 보쌈이란, 그래서 과부 해방에다 약탈혼인을 겸한, 자못 편리한 물건이었다.
선용은 지나간 해 가을 사 년 가까이나 긴 방랑을 마치고 황해도로 좇아 경 기 땅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두루 생각하였다.
전후 두 차례나 객지로 나가 떠돌아다니면서 약간 풍상도 겪고 하였다.
소득은 무엇이냐.
별반 두드러진 소득이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
도로 다시 시골 구석에 가만히 꿇어엎드려, 농사나 짓고 한다는 것은 가사 옥랑에게 대한 번뇌가 아니더라도 도무지 갑갑하고 마음에 차지를 않는 노릇 이었다.
그렇다고, 또다시 인삼 삽짝이나 해가지고 나서 보았자, 조선 전판을 거진 다 다녀본 나머지니 더 다닐 곳도 없는 것.
서울은 가 있자 하니 가 있으면서 할 일이 무엇이며, 하는 것도 없이 매부 영석의 집에 의탁하여 신세만 진다는 것도 당치 아니할 말.
아주 서울로 솔가를 하여 오자면, 그러는 날이면 무엇이든 생화가 있어 야할 터인데, 선용쯤으로는 넘고 처져서 서울바닥에서 가족을 부양할 만한 생화 거리가 졸연히 있으련 싶지가 않았다.
'역시, 산으로 들어가, 사냥이나 해먹으면서 세상과 등지고 살다가 혹시 계제 보아서……’ 막상 이 도리밖에 없을 것 같았다.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한 달 가량 사냥꾼을 따라다닌 일이 있었다.
범, 곰, 멧돼지 같은 사나운 짐승은 쏘아서 혹은 싸워서 잡고, 험한 산과 직 직한 숲을 달리면서, 사슴이니 노루니 따위를 몰고…… 있는 기운을 마음 껏 부려본다는, 그것 한가지만으로도 우선 속이 후련한 일이었다.
호젓이 산에서 사니 누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고 시비할 사람 없고.
썩어빠진 세상, 아니꼬운 양반붙이, 기승스런 왜놈, 다 꼴 보지 않으니 마음 편코.
그리고, 그러다 차차로 무리라도 모이든지 하면, 그때는 한편으로 달리 할 일이 있고.
이쯤 선용은 작정을 하여 두었었다.
독립협회는 선용을 잠깐 몇 달 흥분시켰다 말았고.
선용이 연장 구한 것을 남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잘 싸서 박돌이와 나눠지고, 이왕 빠진 충청도 일판을 둘러본 후, 고향집에 당도한 것은 삼월 바로 초생이었다.
노독을 풀 사이도 없이 당도한 사흘 만에, 선용은 박돌이를 데리고 우선 곰의 고개로 올라가 두루 둘러본 후, 다시 거기서 준령을 타고 동북쪽으로 이십 리 상거의 '노루재’로 들어갔다.
생각던 이와 같아, 어느 편으로 보나 역시 노루재가 나았다.
곰의고개는 험하고 호젓하다지만, 이쪽 저쪽에 큰 시장(市場)을 끼고 있어 장꾼들의 왕래가 잦고, 길도 제법 길다운 것이 나서 있었다.
노루재는 그러나, 좌우가 몇백리씩인지 모를 첩첩한 산으로 연하여 있 음은 물론 이요, 앞과 뒤도 앞으로 삼십 리, 뒤로 사십 리를 가야 비로소 조그만씩한 화전마을(火田部落)이 하나씩 나올 따름, 그 안팎 칠십 리 안짝에는 인가라는 것은 통히 없었다.
길도 그래서, 일 년에 몇 번, 사냥꾼과 산삼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오 고가고 할 뿐이요, 초군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변변히 길이랄 것이 없는 형편 이었다.
단지 사냥이나 하고 있기로 든다면 모르거니와, 앞으로 달리 일을 하자며는 노루재에다 자리를 잡는 것이 훨씬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더우기 노루재에는 마차운 곳에 집이 한 채가 있어서 좋았다.
고개 마루턱에서 서쪽으로 두어 마장 고개를 내려가다 왼편으로 꺾여 한참 들어가노라면, 조붓하게 말편자 모양(馬蹄形)으로 된 그 안에 가 삼 칸집 이하나 있었다.
한 칠팔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여기에다 물역을 들여 집을 짓고 통령( 通靈: 도술 공부)을 한다고 하다가 미쳤다던가 죽었다던가 해서 지난해 봄부터 이 집은 비어 있었다.
안방 건넌방에 대청마루까지 있고, 지붕이랑 벽이랑 구들이랑 다 성하고, 또 뒤꼍으로는 옹달샘이 있고 하여, 문에다 종이나 붙이고 부엌에다 솥 단지만 붙이면, 아무 때고 사람이 거접하고 살기에 아쉬울 것이 없을 만한 마침 감이었다.
곰의고개에다 자리를 잡는다고 하면, 집은 짓지 못할망정 움을 치자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루 이틀에 수월히 될 일이 아니었다.
자리는 그리하여 노루재로 정하고.
선용과 박돌이는 이튿날부터 양식을 비롯하여, 건개며 살림 제구며 금침과 의복까지 한동안 그릴 것이 없도록 마련을 해서는 올려간다 하느라고 칠팔일을 골몰하였다.
그러자, 내일은 아주 산막으로 들어간다는 날이었다. 박돌이와 저자에 나갔다. 주막에 들어 술을 한잔씩 마시는 참인데, 주모가 웬 사람과 저희 끼리하는 이야기였다.
"백생원이 서울로 떠난다지?"
"떠난답니다."
"울화로군."
"울화두 나죠…… 무남독녀 딸 하나 두었다 출가라구 시키니깐 새파란 청상과부가 되니."
선용은 귀가 번쩍하였다.
마시려던 술잔을 도로 놓고 주모더러 물었다.
"아니, 백생원 딸이면 저 버드실루 출가한?"
"그렇죠."
"상부를 했어? 과부가 됐어?"
"것두 여태 모르시우?"
"내야 객지루 다니다 돌아온 사람이 걸 알 탁이 있나…… 그래 언제 그렇게 됐는구?"
"그게 작년 섣달 대목 임시니깐, 두 달두 채 못됐죠."
선용은 속으로, 오냐 그렇다면 내 할 일이 한가지 있도다 하고, 이튿날 박 돌이만 먼저 노루재 산막으로 올려보냈다.
보쌈이라는 것은 동네가 장정들이 온통 들끓어 가서 과부를 싸오고, 그러느라 구 양편 동네가 시끄럽고, 따라서 푸짐하고 한 법인데, 선용은 구태여 그렇게 요란스럽게 떠벌릴 필요가 없었다.
버드실 근처의 마을로 가 실직한 교군꾼으로 네패 교군 한 채만 차렸다.
차려서 데리고 가서는 손쉽게 싸서 옆에 끼고 나와 교군에 실어 교군을 몰고 달려와……지극히 간단하고 조용하게 해치웠다. 그리고 교군꾼들의 입에 서 간 곳이 소문도 퍼지려니와 교군이 험한 곰의고개를 오른다, 숲속으로 산을 타고 노루재까지 간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곰의고개 밑에서 교군일랑 돌려보내고 속 알맹이만 들쳐업고 산으로 오고.
산막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이미 날이 새려고 하였다.
선용은 옥랑을 안방에다 내려놓고 나와, 조용히 박돌이더러 잘 지키면서 동 정도 보고 하라고 이른 뒤에 혼자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하여커나 놀람이 진정 되게 하자는 것이었었다.
선용은 늘어지게 한잠을 자고, 해가 훨씬 한낮 가까이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박돌이는 마당에 가 오도카니 앉아 지키고 있다. 선용이 손짓을 하는대로 가까이 온다.
선용은 박돌이를 멀찍이 데리고 가 가만가만히 묻는다.
"그래, 어떡허구 있지? 울구, 몸부림치구 아니해?"
"울긴입쇼, 몸부림은입쇼."
"그럼?"
"그린드끼 고대루 여태 앉었는 걸입쇼, 눈 요로케 내리깔굽쇼…… 아이 무서. 이쁘긴 이쁜데, 찬바람이 사뭇 도는걸입쇼."
"매친 것…… 그래, 무얼 좀 먹으라구 권해 봤나?"
"거기다 무얼 좀 먹으라면 먹을깝쇼? 그래, 꾀를 하나 냈읍죠. 미음을 어쨌든 물쿠름하게 쒀설랑 큼직한 그릇에다 해서 들여노면서, 헴 여긴 우물 이십 리나 돼, 급자기 물을 길어오질 못하니 혹시 목마르시거들랑 이 거래 두 좀 마십쇼 했더니."
"허허, 그래서?"
"들은 상두 않더니, 나중 문틈으로 들여다본깐 웬걸입쇼, 절반이나 자신 걸입쇼."
"허허, 뚝배기보담 장맛이 낫다더니, 제법일세그려나."
"그리군, 조금 아까 또 들여다본깐, 마저 다 자시굽쇼."
"쯧, 목두 타겠지."
선용은 소쇄를 하고 나서 비로소 안방으로 들어갔다.
옥랑은 사람이 들어오건만, 박돌이 말대로 눈을 내리깔고 그린 듯이 앉아서 거듭떠보지도 않는다.
선용은 빙긋이 웃으면서, 한참이나 옥랑의 하얀 가리마 자리를 내려다 보다가, 바로 그 앞으로 가 앉는다.
"날 알아보겠소?"
옥랑은 이미 속으로 ' 오냐, 나는 이대로 앉아서 죽는다. 욕을 보이면 속절없이 욕은 보리 라마는, 죽으면 다 그만이다. 먹지 않고, 언제까지고 이대로 앉았노라면 죽어지는 날이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 있었다. 그러고서도 갈증을 견디지 못하여 연방 미음은 먹었으니, 사람이란 결국 약하다고 보자면 한량없이 약한 것이지만.
아뭏든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날 잡아먹어라 하고대 껄도 않고 항거도 않고 하자던 것인데 ' 날 알아보겠소?’ 라니 곡절이 있는 일이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보니, 천만 생각 밖에 그 장서방이 아니더냔 말이었다.
와락 반갑고 마음이 뇌고 하였다.
이 마음이 뇐다는 것, 즉 안심은 그러하되 위급한 자리에서 구원을 하여줄 사람을 만난 안심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사람이기 때문에 위급의 위급성이 해소된 그 안심인 것이었다.
그러나 옥랑은 그렇게 선용이 반갑고 마음이 뇌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런 거조를 한 그에게 대한 미움과 분함이 무섭게 치밀어올랐다.
이 날 이 순간으로부터 옥랑의 마음은 완전히 두 갈래로 찢어져 가지고, 끝 끝내 서로 각돌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옥랑은 이내 도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입술을 아긋이 깨문다. 얼굴은 핏기가 확 퍼지고 숨은 잦았다.
선용은 옥랑의 손길을 덥석 쥐면서 간곡한 음성으로 "십 년, 가슴에 묻은 원을 인제는 풀어도 상관이 없지 않소?"
"………"
옥랑은 붙잡힌 손길을 홱 뿌리친다. 그는 벌써 죽기로 결심을 하고 무슨 짓을 하거나, 날 잡아 먹으라고 항거조차 아니한다던 싸늘한 고깃덩이일 수가 없었다.
무어라고든 한바탕 발악을 해 퍼부어 주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고개를 번쩍 들고 똑바로 선용의 눈을 보면서 "이 천하 오랑캐 같은 놈아, 너도 사람이냐?"
"분하거든 분이 풀리도록 욕을 얼마든지 하구려. 그러나 내가 그대를 불 속에서 목숨을 구해준, 그 은혜 갚음을 받자구 이럭허는 것은 아니오."
"누가 것 말인감…… 내가 무얼 입구 있는지 몰라? 엊그제 겨우 사십구일이 지났어. 삼년상 벗기두 전에, 그래…… ""오오!"
선용은 놀라면서 절절 히 "깜박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오, 깜박 그만…… 오랑캐 아냐 더한 책망을 들어두 할 말이 없소."
"………"
"가시오. 데려다 주리다, 지금 당장."
"………"
"그렇지만 삼년상 치르구 나서는 올 줄 알아요."
"올 건 어딨든 구 ""아니 온다?"
"그럼."
"정말?"
"내 송장이나 업어오지."
"정말?"
"어떡헐 텐구?"
"못 가."
선용의 태도와 음성은 강경하였다. 그는 거듭 "못 가."
"죽이려므나."
"오늘은 못 가. 내일 가…… 오늘 내 사람 돼 가지구, 내일 가. 그 래야 딴 맘을 먹지 못해."
"죽이든 살리든 맘대루 하려므나."
"이거 봐요…… "선용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타이른다.
"여자가 그렇게 기승스러면 못쓰는 법이오.여자는 온순해야 해요."
"………"
"내가 집을 버리구 칠십의 편모와 젊은 가숙을 버리구, 유랑객이 되어 떠돌아다니다 필경은 세상까지 버리구, 이 산중으로 들어온 것이 다 뉘 탓인지 아시요?"
"………"
"폐일언하구, 오늘 밤 지나구서 내일 데려다 줄 테니, 삼년상 치르구 나 서 내가 내려가, 기다리는 곳까지, 그대 발로 걸어올 생각하시요."
이튿날 새벽에 산을 내려간 선용은 저녁 새때나 되어서 돌아오더니, 옥랑을 들쳐업고 또다시 산을 내려갔다.
옥랑은 하릴없이 절개를 꺾이고 만 일을 생각하면, 천길 뛰고 싶게 분하였다. 업고 가는 목덜미를 아드득 살점을 물어떼어도 분은 풀릴까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왕 절개까지 꺾이고 하였으니, 도로 내려가고 무엇하고 하느니 보는 이가 있나 부끄럴 사람이 있나, 그대로 주저앉아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또한 솔깃하였다.
삼년상도 치르지 않은 사람을 이런 법이 있느냐고 꾸짖었더니, 뉘우치고놓아 주더라고 하면, 누구나 곧이는 들을 것이었었다. 그러나 남은 속인다지만 내가 나를 속이지는 못하는 것…… 차마 마음에 부끄러워 어찌 시어머니를 섬기며, 죄스러 어찌 새서방의 제청을 대하더란 말인고.
이런 일을 생각하면 더구나 ' 나 삼년상이구 무엇이고 다 그만두겠으니, 도로 올라가 살고 맙시다.’ 하는 말이 목안에서 나와지려고 나와지려고 하기 몇번인지를 몰랐다.
어둑어둑해서 고개 밑에 당도하니 교군이 등대하고 있었다.
선용은 교군 뒤를 따라 버드실 동구 밖까지 왔다. 거기서 돌아서려면서, 가마 휘장에다 대고 "잘 가시오."
하였다.
옥랑은 그만 설움이, 무슨 설움인지 복받쳐, 곧 울음이 터져나오려고 하는것을 억지로, 억지로 삼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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